공사상과 허무주의

불교강좌

2007-12-16     관리자

 유마경에 보면 사리불은 잠시,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래서 중생도 공하다면 도대체 제도할 중생이란 없지 않은가?] 하고 의심합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가 제일인 사리불까지도 공을 이와같이 허무한 것으로 잠시 생각할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이 공을 허무주의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같이 오해의 여지가 많은 공의 논리는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공의 사상을 전통적으로 공관이라고 합니다. 공관을 이론적으로 기초를 세운 나가르쥬나[용수] 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중론>에서 공관의 의의를 밝히고 있습니다.중론의 사상은 인도인의 깊은 철학적 사색의 소산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의 하나라고 합니다. 중론의 사상에 대한 해석을 두고 근대의 여러 학자들은 혼미에 빠져 여러 가지로 비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L. 쁘쓰. P. 도이센, S. 다스쿠프다와 같은 학자들은 중론의 공관사상을 허무주의 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O.후랑케, M.와레샤, A.B. 키츠같은 학자는 부정주의 라고 합니다.  이밖에도 Th. 체르바트스키,  R.구룻세는 상대주의 라고 비평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유명론으로 보는 이도 있고 환영설을 주장하는 이도 있어 그에 대한 학설이 분분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고, 체르바트스키는 <불교에 있어서 니르바나의 관념>이라는 책에서 인도 고대에도 이미 중관파를 기분이 나쁜, 파괴적인 논리를 전개하는 허무주의자라고 지적하고 있을 만큼 이 중관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와같은 비평은 근대 훨씬 전에 이미 있었고 [파괴적] 이라고 할 만큼 이단시되었습니다. 이간이 불교 밖에서 일어나는 해석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불교 내부에서도 중관파는 허무주의라고 간주되었습니다. 

 고대 인도에 있어서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불교, 예를 들면 소승불교, 그 중에서도 철학파의 대표적 집단인 설일체유부는 중관파를 가리켜 [일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도무론자]라고 비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평은 그들이 [일체가 있다<일체유>]를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파를 그 반대 쪽에 두어 비평하는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 밖에 일체유부와 함께 유력한 당시의 철학파를 이끌고 있던 바스반두는 소승불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구사론에서 중관론자를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 풀이하고 그러한 사람은 [일체의 법체가 모두 없다고 하는 사람]이며 [일체가 없다고 하는 집착]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윤회의 개인적 주체인 보특가라를 인정하는 독자부라고 하는 학파와 함께 불교안에서는 이단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관파와 같이 대승불교에 속하는 유가행파로부터도 적지안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어떠한 극단에도 기울지 않고 중노를 설한다고 하는 중관파가 유가행파의 스티라마티에게서 하나의 극단을 주장하는 극단론으로 간주되고 달마 빠라는 [유식의 이치를 잘못 알아 오류를 범한 자),  따라서[비유(존재하지않는것] 집착한다]고 비판받고 있습니다. 또한 지나프트라는 그의 저서 <유가사지론석>에서 곧견(공에집착한견해)에 집착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중관파가 무를 설했다고 해서 여러 학파로부터 이단시 되고 배척을 받으며, 근대의 여러 학자로부터도 허무주의라고 비평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론은 [있다(유)][없다(무)]하는 상대적인 두 극단, 이것을 이변 이라고 합니다만, 그 두 극단에 속하는 [없다(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중관파는 말합니다.  중론의 본문인 수 많은 시구들은 유와 무의 두 극단[이변]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나가르쥬나는 [유]를 부정할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유]가 없는 이상 당연히 [유]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무]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유와 무의 두 극단이 부정된이상, 사물이 항상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 즉 상견(상견=유)과 사물은 수 없이 변화하며 순간 순간 멸하는 것이라는 주장, 즉 단견(단견=무)의 두 가지 견해는 당연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같이 중론에 의해서 배척되고 있는 단견을 오히려 허무주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S.다스쿠프다는 그의 저서<인도철학사>에서 단견도 허무주의이지만 이것을 배척하는 중관파도 허무주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이 양자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관파의 찬트라키르티는 중론의 주석서<프라산나파다>에서 중론의 무는 허무론자의 그것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관파는 허무론이라고 하는 그들의 반대파에 대해 [허무론자들과 중관파의 사이에는 구별이 있을 것이라고 옛날의 스승들이 설하였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오류를 귀납시키는 논법으로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그만 두기로 하자]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중관파의 입장를 찬트라키르티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중관파에 있어서는 독립된 초론을 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왜냐하면 <두 개의 극단적인> 입장의 한쪽을 승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관파의 무가 유와 상관관계에 있는 무와는 다른것임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자기 주장을 함으로써 빠질 이론적 결함에 대해서 나가르쥬나는,  [만약 나에게 어떠한 주장이 있다면 그로 인하여 나에게는 이론적 결함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주장이 없다.  때문에 나에게는 이론적 결함이 없다.] 했습니다. 

 이것은 중관파가 그 어느 주장, 즉 두 극단의 어디에도 기울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나가르쥬나의 제자 아리야데바는, [만약 사물이 있어{유)든가 없다(무)든가 있지도 없지도 않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리 긴 시간을 소비하여도 그를 논리적으로 힐난할수가 없다.]  고 합니다.  중관파는 여기에서 유. 무를 떠날 뿐 아니라 유.무를 부정하는 입장까지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