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결혼. 행복의 장] 배우자를 어떻게 선택할까

여성. 결혼. 행복의 장

2007-12-15     광덕 스님

     (1) 바로 알고 선택하자.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행.불행의 갈림길은 도대체가 알고 모르는데 달렸다고 해석된다. 행복의 극치라 할 성불이라는 것이 필경 일체지를 갖추어서 일체 한계와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을 뜻하는 것이고, 고통의 바다를 헤맨다는 중생살이의 출발은 무명(無明)이라 하는 미혹이 그 시작이다. 밝게 알았느냐?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모르느냐?의 두 극단사이에 천만층의 차별이 있어서 천만층의 중생살이가 벌어지고 다시 그 속에 천만가지 행.불행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고자하면 지혜의 눈을 떠서 진리를 밝게 아는데 지냄이 없고 고통을 거둬들이고 싶으면 방탕에 빠져 지혜의 눈을 덮어두고 나태나 악행이 그 첩경이 된다. 

  결혼을 새로운 생의 출발로 삼는 것이 인생의 상식이다. 그런 만큼 그 새로히 출발하는 인생이 행복하냐 불행하냐의 갈림도 결혼을 바로 알고 하느냐 또는 모르고 하느냐 또는 결혼 다음에 어떻게 결혼의 원리를 알아서 노력하였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때는 됐고 인간으로 한번은 하는 것이고 인연이 있으니 걸혼한다는 무자각적·피동적 결혼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결혼에 대한 무지와 나태가 거기 있기 때문에 결혼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인생이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다.

     (2) 결혼상대방은 숙명적인 것일까?

  세간에 흔히 전해오는 말로 결혼을 연분이라 한다. 그래서 수많은 청혼도 받아보고 수없이 구혼도 해보고 수없이 선을 본 경험을 가진 결혼에 있어 역전의 용자들도 결혼하고 나서 의례 『결혼은 역시 연분이다 』라고 하는 말을 흔히 듣는다. 성립될듯 말듯한 아슬아슬한 고비를 여러차례 치르고서도 마침내 수포로 돌아간 사람이 결혼을 체념하다시피 한 처지에서 홀연히 지금의 연분이 나타나서 수월하게 영예의 꼴인을 하였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역시 결혼에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에 있어 과연 그런 숙명적· 결정적 인연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해서 그러한 기계론적 결정론은 없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결혼의 상대방을 선택하는 것이다. 다만 그 선택에는 기초에서 몇가지 전제요건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금생 한번 만을 독립해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먼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 과거생의 연속으로써 금생이 있기 때문에 과거생에 형성된 다음 두가지 요인이 금생에까지 작용해 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하나는 결혼하는 당자의 성격문제이고 또 하나는 상대방과의 인연이다.

  첫째는 당자의 성격문제인데 예를 들어 어떤 결혼기피적 성격을 가진 여성의 경우 (이점은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과거 생가운데 애정의 파국적 체험을 통하여 심각한 사랑의 슬픔을 체험한 사람은 그것이 의식의 심층부에 상처로 남아 있어 결혼기피적인 성격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밖에 오늘을 형성하고 있는 성격이 금생에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지만 또한 과거생을 계속해 오는것이므로 과거생은 일단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과거생이 오늘의 나를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니여서 개혁과 선택의 결단은 항상 오늘 나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바른 지혜와 바른 노력으로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결혼상대방과의 인연 관계를 말한다면 이것도 과거생의 결과로써 오늘의 인연 있는 상대방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자는 아닌 것이다. 수많은 과거생에 인연을 가졌던 사람들이 한 두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금생에 결혼상대방도 오늘의 결단에 의하여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생 가운데 인연이 상호 부채관계의 상환같은 관계이거나 보복적 관계이거나, 아니면 보다 극단한 원결의 인연을 가진 그런 과거도 있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하나 둘이 아닌 것이다.

   물론 공동의 이상의 꽃을 피울 과거인연의 상대방도 수없이 많은 것이다. 이상으로 보아 결혼상대방의 숙명적 결정설은 성립될 수 없고 어디까지나 바른 지혜의 판단에 의해서 오늘 선택할 과제가 인생 앞에 주어져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이 아니면 차라리 죽겠다 』하고, 절대절명의 골목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서로가 좋아서...』또는 『천생연분...』하며 무턱대고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결혼은 그렇게 뜨겁게 덤벼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설사 『이 사람만이 유일한 인연이다.』생각되더라도 생각을 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 또한 그런 판단을 할 어른과 상의할 필요가 있다. 과거생부터의 인연을 말한다면 그것을 알기도 어렵고 또한 한두 사람만이 아닌 것이다. 결혼요건 중에서 요소에 해당되는 부분과 그 밖의 것을 혼동하는 것을 흔히 보는데 이 점은 냉정히 살펴 보아야 한다.

     (3) 배우자 선택의 표준

  『결혼할 상대방으로 어떤 사람을 원하느냐?』는 질문을 젊은 남녀에게 들여대는 것을 라디오에서 종종 듣게 되는 것이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이 얼마나 깊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인진 모르겠다. 여성에게 물으면 대개는 『건강하고 가정적인 남성 』을 습관처럼 내세우고, 남자에게 물으면 『여자로서의 덕성 』을 유행처럼 외워댄다. 그 사람들은 남자는 가정에 매인 송아지나 가정이라는 멍에를 메고 젖을 공급하는 젖소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고 여자는 유순한 남자의 시종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결혼에 있어서 부부에게 그런 층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그것이 표준이 된다면 큰일이다.

  그러면 『미모』인가? 사람의 용모란 그림자 같은 것이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바뀌는 것이요 지성이나 감정의 변화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육체란 도대체가 죽음을 향한 진행이 아닌가? 마음의 표현으로써의 용모이기 때문에 관상으로 인물평가가 될지는 몰라도 마음은 끊임없이 새로울 수 있는 것이므로 나타난 용모만을 기준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재산』인가? 가정의 경제적 토대가 중요하므로 재산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두는 것을 보지만 재산은 도대체가 인간에게 첨가된 것이요 활동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아무리 돈이 좋기로서니 돈과 결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재산에 현혹되어 사람을 보지 않고 허겁지겁 서두른 결혼이 파탄을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본다. 이야말로 결혼의 의미를 망각한 유령과의 결혼이라 할 수 밖에 없다.그러면 『숭고한 가문』인가? 옛날부터 집안을 보면 자손을 안다고 하고 결혼이 당사자간의 결연이라기 보다 가문과의 결연이라는 관념도 중시되어서 이점은 사뭇 오늘날까지 많은 공명을 얻고 있다. 인격이라는 것이 유전적인 면도 있고 학문과 수련에 의하여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성장기의 정신환경이  그 어떤 교육보다도 중요한 것이므로 역시 숭고한 가정환경은 당자의 인격평가와 함께 중시할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가문이나 가정이 인간의 전부는 아니다. 한 인간이 성장하는 환경이며 여건이고 다만 그것이 인격형성에 중요하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조실부모하거나 가정적 환경이 없이 성장한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높은 인격과 덕성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취미나 성격』인가? 대개 한 인간에 있어 취미는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리고 그의 성격은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끊임없이 형성되어 가는 인간성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성격을 탐지할 장치나 방법도 없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하여튼 취미와 성격은 인간선택에 중요한 자료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건강』은 어떠할까? 확실히 건강은 결혼상대자 선택요건에 한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다고 코끼리처럼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기본단위가 건전해야 하는 것은 결혼이 관념이나 환상의 희롱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이라는 육체 조건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깊은 이해나 성스러운 사랑이라도 육체를 제외한 결혼이란 예외에 속하는 것이다. 결혼의 상대자 선택문제에는 의례 지위니 명예니 부모의 재력이나 사회적 명망이니 또는 당자의 생활력이나 인간적인 이해성이니 그 집안의 사회적인 명성이니 심지어 친척의 부귀나 권세 등등 여러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보지만 이런 문제를 무턱대고 관심갖을 것은 못되는 것이다. 당자의 생활력이나 지식정도는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고 인간의 성실성으로써 새로운 향상과 보완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밖에 가문의 명성이나 부모의 지위나 권세 등은 저녁연기 같은 것이어서 흥망성쇠가 무상한 것인데 그런 것을 결혼의 중요한 요소로 고려한다는 것은 골탕먹기 알맞은 것이다.

    (4) 세 가지 기본포즈

  그러면 결혼에 있어 상대자 선택의 요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대개 세가지를 들고 싶다.

  첫째는 인생 목표나 이상에 대한 공동성이다. 결혼이 남녀가 결합하여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서로가 향상하는 인연인만큼 거기에는 반드시 높은 인생의 목표와 이상에 대한 공동의 유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을 때 결혼 후 의외의사태를 만난다) 어쨌든 인생이라는 가치에 대한 일치성과 공동의 향상이라는 높은 합일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뚜렷이 성문화할 수 있는 명확한 합일이든, 아니면 깊은 신뢰속의 암묵의 일치이든, 하여튼 생의 목표에 대한 공동적 합일은 결혼의 제1차적 요소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결혼이 당사자에 의하여 이해되고 승인되고 확인되어야 한다는 점을 긍정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육체적 조건이다.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는 앞서 말한 바이다.

  세째로는 당사자의 영적 견인력(牽引力)이라 할까. 서로의 깊은 사랑과 신뢰감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풀어 말하기 어렵지만 이러한 영적인 사랑과 신뢰감이 없는 결혼은 비참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단순한 육체적 견인력이나 취미의 동일성이나 어떤 정신적 매력이나 감상적 동정으로 결혼이란 이룰 수 없다. 지면관계로 이만 거두지만 결혼이 양성의 결합을 통하여 완전한 높은 이상의 추구라는 근본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상 세가지 조건은 최후적이고 그 어떤 하나가 없어도 원만한 결혼이라 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높은 정신적 영적 일체성에서 비로서 결혼의 원만과 신성이 보장되는 것임을 끝으로 말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