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 나의 불교

창간 7주년 기념 강연 요지

2007-12-13     관리자

     [1] 불교는 대수학(代數學)

   서양 사람들은 불교를「The philosophy of Happiness」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대철학자들, 인도사상가들의 학서를 읽어보면, 서양적인 합리적 해석으로서 불교 이상의 행복 철학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과학적인 머리로 해석할 때 불교는「행복의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철학으로서 이 이상의 금성철벽(金城鐵壁)이 없다고 하는 그것이 서양에 있어서의 불교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불교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행복의 철학, 무엇 무엇의 철학이라고 하는 구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학의 한 파, 어떤 카테고리 속에 넣어 생각할 수 없는 큰 것입니다. 모든 사상과 철학을 초월하여 그것들을 포용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그 우주조차도 포용하고 있는 큰 진리입니다.
   그러나 불교인 아닌, 더구나 실제 만지고 보아서 증명해야만 그것을 인정하는 서양인들이 그렇게나마 이해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렇게라도 이해를 하기 때문에 지금의 불교가 세계 불교로 뻗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불교를,「행복의 대수학(代數學)」이라고 말합니다.
   대수라고 하는 것은 산술, 기하, 미분, 적분, 통계 등 수학의 여러 분야중의 하나입니다. 가령 2+5=7이다 하는 계산을 산술이라고 하는데, 이 산술의 셈에 있어서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 천체와 천체의 운동에 관한 계산 등을 함에 있어서는 그 산술에 쓰이는 숫자가 엄청나게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큰 숫자 대신 거리는 A, 시간은 B라는 식으로 숫자대신 문자로 표현합니다. 그리하여 그 문자로서 x라는 답을 냅니다. 이렇게 숫자를 대신하여 문자로 계산하는 것을 대수학이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하게 계산된 대수학이라 하더라도 그 문자 대신 구체적인 실수를 넣어야만 우리가 원하는 실제의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교를 서양 사람들의 표현 방식으로 대수학이라 한다면 거기에 구체적인 수를 대입하여야만 우리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이 설하신 팔만대장경 경문 전체는 그 대수학의 공식인 셈입니다. 그러나 공식만으로는 답[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실제 수[실천]을 대입하여야만 합니다.
   이 수를 대입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분이 바로 부처님의 제자이신 스님들이십니다. 스님들은 부처님 법문을 중생들에게 설해주고, 따르는 방법을 가르쳐 우리 중생들을 부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그 방법에 따른 본인들의 실행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구하고자 하는 궁극의 답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학과 불교의 얘기로 들어갑니다.

     [2] 불교와 문학(文學)

   문학을 하는 사람과, 부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행을 닦는 스님들과, 불교의 대수와의 관계를 말씀하려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팔만대장경, 이 이상의 문학이란 이 세상엔 없습니다. 불교의 설법은 곧 문학입니다. 그런데 불교 경전을 굳이 문학이라 하지 않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경은 우리의 속세적인 언어인 문학으로 표현되는 이상의 것, 즉 중생 구제, 영혼 구제라고 하는 큰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큰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분되는 문학과 불교, 그중 문학을 하는 문학인인 제가 문학의 불교추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스님이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그 가르침대로 따라 부처가 되는 길을 직행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고 목표인 성불의 길, 그 길 중 가장 빠르고 모범된 길이 승려가 되어 수행하는 길이라고 부처님께서 밝히고 인도하셨고, 스님들은 그 길을 추구하시는 분들입니다.
   부산에서 서울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비행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가들은 그 빠른 길을 택하지 않고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산도 넘고 물도 건너는 이런 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둘러서 서울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부처의 수는 갠지스 강가의 항하사(恒河沙)를 제곱한 것만큼 많다」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부처가 되는 길이 수천억 정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하고 있는 일만 열심히 하면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길이 성불(成佛)로 통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그 많은 길 중의 하나인 문학으로써 귀의했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경에 분명히, 스님이 되어 행을 닦는 것이 부처가 되는 지름길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거역하며 굳이 문학을 통하여 이룩하겠다는 의도에 대한 설명은 제 문학의 태도를 말씀드리면 답이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반야지(般若智)입니다. 반야지란 순수한 것, 잡스러움이 없는 것, 오로지 진여(眞如)에 통하는 그 지혜인데 문학을 하는 사람은 그 반대라 할 수 있는 세간지(世間智)에 집착합니다. 이 세간지의 먼지를 털어야만 반야지에 이를 수 있는데 문학가들은 이 세간지에 온통 집착합니다. 물론 불교 문학, 종교 문학을 하려는 분은 자신이 증득한 반야지를 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문학을 하기도 합니다.
   문학가들은 이 세상이 악하면 악한 그대로, 사랑의 집착은 사랑의 집착 그대로를 표현합니다. 여기 슬픈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종교인은 그 슬픔을 끊으라고 초월하라고 말하지만 문학가는 그 옆에 함께 있어줍니다. 그를 슬픈 그대로 실컷 슬프게 놓아둡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언젠가는 그 슬픔이 끊어질 것입니다. 그 슬픔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사랑이 깊어서 동반자살한 사람의 이야기, 돈이 탐나 사람을 죽인 이야기 등을 문학은 아무런 첨언 없이, 죽지 말라 초월하라 죽이지 말라는 말없이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라고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19세기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격조 높은 시로 신이 죽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근세기의 아인슈타인과 같은 대학자들도, 이 세상을 창조하고 자기 이름을 빛내면 천당에 데리고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내모는 그런 인격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들의 짧은 지혜로 보아도 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을마다 교회는 번창하고 신의 은총을 믿고 갈구하는 사람은 줄지 않습니다.
   그 후 재력, 돈의 무용을 선언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마르크스입니다. 그는 그의「자본론」에, 사회악은 빈부의 차에서, 빈부의 차는 사유재산 제도에서, 사유재산 제도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생겨났다고 원인을 분석하여 무계급의 사회를 추구했습니다. 여기서 돈은 이미 그 가치가 없음이 밝혀졌지만 돈의 위력은 날로 커가고 있습니다.
   또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철학자들은 권력을 분석하여 그 무가치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의 무화의 주장이 올바름에도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습니다.
   서양사상에서 이제서야 밝혀진 이 모든 것들의 무가치를 부처님께서는 이미 2천5백 년 전에 설하셨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사상, 옳은 가르침이라도 그것에 부연된 작용이 없으면 그것은 아까 말한 대수학의 공식일 뿐입니다.
   문학은 이 엄청난 진리를 한꺼번에 설하는 것이 아니라 한건한건 Case by Case로 하자는 것입니다.
   옳은 말일수록 더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학가들은 옳은 말을 글 속에 집어넣지 않습니다. 수천 년 성인들이 말씀해 온 그 옳은 말을 잘못된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줌으로써 인간 자신이 저절로 깨닫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 복잡함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꾸며 중생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 끌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3] 나의 문학관(文學觀)

   반야지는 세간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간지에 뛰어들어 함께 맞고 때리며 단련됨에서 반야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동시에 이 세간지에 뛰어들어 함께 부대끼는 문학도 반야지에 대한 부단한 열망과 노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태평양과 같이 넓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뜨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뀝니다. 부처님의 그 넓은 자비 법문을 우리는 우리의 그릇에 맞추어 떠서 그 넓은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문학을 가능하면 부처님 말씀 빌리지 않고 불심(佛心)을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위대한 자비로 인간 마음속의 자비를 이끌어내는데 제 필력을 쓰고자 합니다.
   그러나, 손오공이 구만 리 밖으로 구름타고 날아보았지만 부처님 손바닥이듯이 역시 저의 오늘의 외람된 말도 손오공의 구름타기와 같은 생각이 듭니다.

♧ 이 글은 1981년 10월 22일 대각사 법당에서 있은 불광 창간 7주년 기념강연요지이다. [문책기자(文責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