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밖의 사찰과 경추봉

열하기행 3

2007-01-05     관리자


남은 사찰은 네 개지만, 세 개는 규모가 작거나 폐쇄되어 있고,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은 역시 보녕사(普寧寺)다. 일명 대불사(大佛寺)로도 불리는데, 대승지각(大乘之閣) 안에 모셔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 때문이다. 이 불상은 높이만도 22m에 달하고, 허리둘레만도 15m에 이른다. 설명을 읽어보니 사용된 목재만 120㎡이고, 무게는 110t이라는데, 머리 부분만 해도 5t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목조불상은 승덕시를 상징하는 마스코트처럼 쓰여, 시내 곳곳에서 불상을 그려 넣은, 성지를 알리는 입간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보녕사는 건륭 20년(1755)에서 24년 사이에 지어졌다. 건륭 시기 산장 밖에 세운 최초의 사찰인데, 중가르 부족의 달와제 반란 세력을 평정한 기념으로 건설했다고 한다. 여느 산장 밖 사찰과 마찬가지로 평지에 건설되어 있는데(물론 지난 회에 본 보타사와 수미복수지묘는 규모 탓도 있겠지만, 후면으로 가면 지세가 조금은 높아진다.) 보타사에 이어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한다.

▲ 보녕사 금칠목불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안치한 보녕사

 아침을 먹고 택시를 잡아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불상에 기도하기 위한 인파인데,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굵고 긴 향대를 저마다 한 움큼씩 쥔 채 입장을 서두르고 있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향대에 불을 붙이고 거듭 예불을 올리는 모습이 조금 어색해 보였지만, 때 묻지 않은 신앙의 표현인 것도 같아 사진기를 들이밀기도 미안했다. 나도 합장을 하고 예불을 올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찰에서 하는 것만큼 감흥은 일지 않았다. 확실히 문화 차이라는 것은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대승지각을 둘러 뒤편으로 가면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건물 몇 채가 자리하고 있다. 특별히 이색적인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돌 언덕길을 따라 엮어놓은 쇠사슬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쇠 뭉치들이 눈길을 끌었다. 꽤 묵직해 보이는 열쇠들이 두릅 엮듯이 묶여 있는데, 그 또한 장관이었다. 마치 금빛 옥수수를 다발로 말려 놓은 것 같았는데, 개수만도 수천 개는 넘을 것 같았다.

뭔가 싶어 자세히 봤더니 열쇠 표면에 결연쇄(結緣鎖)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사람 이름이 줄줄이 쓰여 있었다. 아마 서로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이렇게 표현한 모양이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는 인간 세상의 어쩔 수 없는 섭리겠지만, 이렇게라도 그런 재앙을 피해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놓은 것이다. 나도 아내와 애들의 이름을 써서 엮어 두려고 했는데, 시간도 없었고 찾으려니 파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아쉽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목조대불은 정말 소문대로 엄청난 규모였다. 3층이라지만 실제로는 5층쯤 되어 보이는 전각 속에 우뚝 서 있는 보살은 짙은 고동색 빛을 띠었고, 옻칠을 했는지 광택이 눈부셨다. 아래서 올려다보니 무너질 것 같아 현기증이 핑 돌 지경이었다. 역시 촬영 금지라 사진을 못 찍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돌아 나오려니 위층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눈에 띠었다. 눈[眼] 구경이라도 더 해야겠다 싶어 무턱대고 계단을 밟았는데, 누가 잡았다. 역시 입장료가 있었다.

두 층을 더 올라가니 불상의 중간쯤에서 아래 위를 다 볼 수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불상은 육중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안내원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몇 장을 찍으리라 벼르고 있는데, 가족인 듯한 한 무리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남도 하는데 나라고 못하랴? 그 때부터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창문이 닫혀 있어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은 불상의 위용을 더욱 웅장하게 장식해 주었다.

안원묘와 보락사

보녕사에서 무열하를 건너 서로 마주보는 곳에 안원묘(安遠廟)가 위치해 있다. 이리묘(伊犁廟)라고도 불린다. 건륭 29년(1764년)에 시공되었는데, 신강성 이리하 유역의 고이찰도강(固爾札都綱, 도강은 몽골어로 사찰이라는 뜻이다)을 본떠 지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변은 주로 밭으로 둘러싸였는데, 건물이래봤자 중앙의 보도전(普度殿) 한 채뿐이지만, 정방형 일곱 칸 3층의 규모는 보기보다 더 장엄해 보였다. 중앙에 모셔져 있는 녹도모(綠度母)는 보녕사 불상만 하지는 않지만, 역시 목조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불상이었다. 녹도모의 도모는 라마교에서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의 화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생들의 고난을 구제하는 선량한 여신인데, 녹색과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흰색 등 다섯 종류의 색채로 구분하지만, 실제는 훨씬 더 많은 색채로 치장되어 수십 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 도모는 녹색이라 녹도모라 불리는 것이다. 어두워 질감이나 색채감을 생생하게 느끼기는 어려웠지만,(왜 좀 조명을 밝게 하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머리에 쓴 보관이며 눈을 감고 사색에 잠긴 얼굴 표정, 연꽃을 쥔 왼손, 반쯤 한 책상다리 등은 경외감과 함께 인자하고 편안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안원묘를 나와 천천히 걷다 보면 보락사(普樂寺)가 나온다. 입구에는 피서산장 명소 가운데 하나인 경추봉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도보로 가기는 어렵고 셔틀버스를 이용하거나 봉우리 아래까지 가설된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보락사를 관광하고 들러도 좋고 먼저 다녀와도 좋지만, 우리는 사정상 절을 다 본 뒤에 경추봉에 가게 되었다. 보락사도 규모로 보면 안원묘와 대동소이하다. 건륭 31년(1766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아래로는 무열하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고 뒤로는 경추봉이 우뚝 솟아 있어 제법 운치가 있다. 대전인 욱광각(旭光閣)은 겹처마에 지붕이 둥근 모양인데, 북경에 있는 천단(天壇)의 기년전(祈年殿)과 외형이 비슷해서 원정자(圓亭子)로도 불려진다.

천왕전에는 중앙에 배가 불뚝한 미륵불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흙으로 빚은 사대천왕이 각각 칼과 비파, 뱀, 보당(寶幢)을 쥐고서는 중생을 굽어보는데, 위세가 대단하다. 그 뒤편에 종인전(宗印殿)이 있고, 이어 욱광각이 당당하게 사찰을 굽어보며 서 있다. 욱광각 천장에는 거대한 만다라가 새겨져 있다는데, 중국 최대 규모라고 하지만 아쉽게도 보진 못했다.

보락사에서 더욱 아쉬웠던 일은 경내 가게에서 산 안내 책자 몇 권을 분실한 일이다. 욱광각 꼭대기까지 올라가 사진을 찍는데, 아무래도 불편해서 계단 난간에 두었더니 잠깐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황금빛 유리기와를 덮은 화려한 모습에 정신이 뺏겨 신경을 쓰지 않은 탓이지만, 설마 책을 집어가랴 했는데, 등잔 밑이 어두웠다. 사람도 많지 않았는데, 누가 집어갔는지 정말 감쪽 같았다. 값이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일정인 부인사(溥仁寺)는 수상사처럼 개방이 되어 있지 않아 담 너머로 전경을 훑어보는 것으로 마감해야 했다.

▲ 승덕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경추봉, 보기보다 훨씬 가파르다

천하기봉(天下奇峰) 경추봉(磬錘峰)

 보락사에 가면 함께 볼 수 있는 비경이 바로 경추봉이다. 피서산장이 산림지대에 있기 때문에 자연 경관도 다들 빼어나지만, 이 경추봉만큼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없다. 까마득한 절벽과 완만한 구릉의 경계선에 위치한 경추봉은 높이가 40m고 위쪽 직경은 15m, 아래쪽 직경은 10m쯤 된다. 1702년에 강희제가 승덕에 와서 이 봉우리를 보고는 거꾸로 세운 경추와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면 한달음에 봉우리 아래까지 닿지만, 셔틀버스를 타면 한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올라가는 길도 가파르지만, 경추봉 아래에 이르면 사실 눈앞이 아찔하다. 얼핏 바위산으로 짐작하겠지만, 올라보니 자갈과 모래흙이 엉켜 뭉쳐진 산이었다. 주먹으로 세게 치면 곧 바스라질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봉우리가 그 긴 세월을 버텼을까 희한했지만, 봉우리 바로 앞까지 가는 길은 겨우 폭이 3~4m에 까마득한 벼랑이라 발길이 영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싶어 간신히 도착했는데, 멋진 경치 구경도 좋지만 영 오금이 저려와 편안한 구경은 하지 못했다.

▲ 경추봉의 높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고판

이렇게 짧은 일정으로 피서산장과 외팔묘, 경추봉을 구경하고 북경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이라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내내 떨쳐지지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좀 더 여유도 갖고 찬찬히 둘러보리라 다짐했다. 아마 겨울에 와도 좋지 않을까? 눈 덮인 산장과 외팔묘의 모습도 여름 못지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