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쉬(Bangladesh)로
동부인도의 중심지인 캘커타는 볼거리도 느낄 것도 많은 곳이지만, 혜초를 잠시 미뤄두고, ‘해동의 나그네’의 발길은 국경을 넘어 이웃 나라인 방글라데쉬로 향하였다. 특별한 유적이 전혀 없어서 관광객의 발길이 드문 이 모슬림 국가를 꼭 가야만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갠지스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단지 강 하나만을 보자고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그 동안 미루어 오다가, 마침 그 곳을 방문하려는 한 사업가를 만나는 바람에 일정을 바꾸어 같이 국경을 넘게 된 것이었다.
캘커타에서 교외선 기차로 3시간 달려 뱅가온(Bangaon) 국경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하면서, 원칙상으로는 우리와 비자 면제 협정을 맺고 있지만 온갖 구실로 돈을 뜯어내려는 관리들과 실랑이를 한참 벌이고, 국경마을 베노폴(Benopol)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수도인 다카(Dhaka)로 향하였다.
방글라데쉬는 1947년 이전에는 인도와 한나라였지만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종교분쟁으로 나라가 갈라질 때 처음에는 동파키스탄으로, 다시 1971년에는 현 국명으로 독립을 얻은 신생국가이다. 하지만 벵갈만에 접한 남쪽과 미얀마와 접한 일부 국경지대를 제외하고는 사방이 인도에 포위되어 있는 지정학적 영향과 1억 5천이나 되는 과밀한 인구밀도 그리고 쌀 농사 등 일차산업에만 의존하고 있는 산업구조 때문에 빈민국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장 법사의 체취어린 사마타타 국(三摩撻咤國)
지금은 종교적인 가치관으로 인해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먼 모슬림 지상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옛적에는 사원이 즐비했던 불국토였다. 혜초의 기록은 없지만 그보다 일찍 도착한 현장은 혜초의 인도 도착지점인 탐나립티 국에서 동쪽으로 9백리 떨어진 이 나라에 대해서, “사마타타 국은 주위 3천여 리이다. 바다에 접했기 때문에 토지가 저습하다. 농업이 성하고 꽃과 과일이 흔하다. 기후는 온화하며 풍속은 질박하나 사람들의 성격은 거칠며 모습이 비천하고 색깔이 검다. 가람은 30여 곳, 승도는 2천여 명인데 모두 상좌부(上座部)를 신봉하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아쇼카 왕이 세운 스투파가 있다. 옛날 여래가 천인들을 위하여 이 곳에서 7일 동안 설법했다고 하며 그 옆에는 과거사불이 산책했던 유적도 있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가람 안에 청옥불상(靑玉佛像)이 있는데 그 높이는 8척이며 모습은 원만한데 때때로 영험을 보인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어서 미얀마·크메르·자바 등의 동쪽의 여섯 나라를 언급하면서 산천이 가로막고 있어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 풍속과 경계는 풍문으로서도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 나라가 나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갠지스 말고도 티벳불교 후홍기(後弘期)를 연 아티샤(D. Atisha) 존자의 고향이어서, 그의 사원의 유적이 남아 있다기에 마음 먹고 국경을 넘어온 것이었다.
‘강가(Ganga)’의 회향지
흔히들 대작의 예술작품을 표현할 때 ‘대하드라마’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처럼 한 작품을 강에 비유하는 것은 물론 분량 면에서 많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드라마의 필수요건인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변화가 자연계의 질서인 ‘생성·유지·소멸’의 법칙과 본질적으로는 그 괘적을 같이 한다는 데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치 어느 가람이 시원지에서 발원하여 시냇물로 흐르다가 작은 강으로, 다시 큰 강으로 변하여 끝내는 바다와 합류하여 그 삶을 마치는 것이 바로 힌두철학의 진수인 ‘삼현(三顯)사상, 즉 ‘트리무르티(Trimurti)’인 ‘창조·순환·파괴’의 논리를 현상적으로 대변하고 있으며, 이는 불교철학의 핵심인 윤회론과도 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 내면에는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우주의 기본적인 질서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근원적인 질서는 ‘법(法)’자를 상형문자의 논리로 풀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법’이란 ‘물(水)이 가는(去) 길’이 되는 것이니 어찌 보면 우주의 진리란 이처럼 간단명료한 것인데 우리가 이런 문제를 너무 현학적으로 어렵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세상의 모든 강 중에서 갠지스 즉 ‘강가’처럼 여러 면에서 특이한 강도 드물 것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유일무이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신화·종교·철학의 나라 인도의 젖줄인 탓으로 수천년 동안 때로는 미화되고 때로는 신성화된 것에서도 그 이채로움의 한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갠지스가 없는 인도민족의 삶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강가’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생명수’그 자체로 수천년 동안 전해 내려왔다.
그들의 삶의 시작과 끝은 강가와 하나로 이어져 있다. 한 마디로 줄여보자면 갠지스는 그냥 강이 아니라 신의 선물인 ‘정화수(淨化水)’- 죽어가는 생명체도 정화시켜 다른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영험한 능력이 있는 물 - 라고 인식되어 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가의 일생’은 드라마틱한 대하드라마의 좋은 모델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하겠다.
혹 어떤 이방인은 인도인의 풍속인, 갠지스에서의 성욕(聖浴)을 단지 시각적으로 더러운 물이라는 이유로 야만시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어찌 보면 우리도 물만한 정화력을 가진 물질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인도인들의 이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를 비웃을 수 없을 것이다.
‘물의 정화력’이라는 거창한 화두 말고도 잠시 곱씹어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도 마시는 생명수의 용도 이외에도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을 물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스스로 자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왕에 몸의 더러움을 씻는 기회에 죄업까지, 나아가 영혼까지 씻고 나머지 인생을 개운한 기분으로 살아보자는 그들의 생각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목욕하는 김에 공짜로 돈 안 들이고 죄업과 영혼까지 씻겠다는데 도대체 무엇을 이해 못하고, 무엇이 문제되랴!
강가의 발원지는 인도 본토에서도 한두 곳을 꼽을 수 있지만 진정한 본류는 대설산 너머 티베트 고원 위에 솟아 있는 카이라스 산 - 필자가 이미 「불광」에 연재하였던 ‘수미산 순례기’에서 바로 이 산이 한역 경전에서의 ‘수미산’의 실제 모델이라고 주장한 바 있음을, 그리고 그 산 아래의 ‘해와 달의 두 호수’사이의 시냇물 이름이 역시 ‘강가’였음을 독자 제위는 기억하고 계실 것이리라 믿는다 - 에서 발원하고 있다.
히말라야 남쪽의 네팔과 인도 대륙을 거쳐온 줄기와 카이라스에서 티베트 고원을 가로질러 대설산을 돌아,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같이 내리꽂히듯 흘러내린 본 줄기가 합류하여 이제 벵갈 만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은하수였다가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잠시 내려왔던 ‘강가’는 그 사명을 다하고 대 드라마의 회향처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이 ‘해동의 나그네’는 그 합류점을 향해 방글라데쉬 삼각주로 달려갔는데, 그 곳은 바로 화리드풀(Faridpur)근처였다. 그 곳에서 우리가 탄 버스는 커다란 훼리보트에 올라가서 그 바다같이 드넓은 강을 몇 시간 동안이나 건너기 시작했다. 보랏빛 옥잠화(玉簪花)가 무리지어 떠내려오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필자는 성취감에 잠길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카이라스에서 시작한 ‘갠지스 종주의 완성’에서 오는 뿌듯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윽고 낮이 다하고 해가 기울면서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해동의 나그네’는 강물 속에서 어떤 환영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분명 카이라스산의 성스러운 봉우리였다.
“어찌 다할 것인가, 그 장엄한 ‘찬미의 송가’를 어찌 필설로 다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