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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왕오천축국전] 1 .해동의 나그네 되어 길 떠나다

개원(開原) 15년(727) 11월 상순 안서(安西)에 이르렀는데 신라 성덕왕 초기, 삼국통일 직후 당나라의 문화를 배우려는 진취적인 기상이 온 나라에 만연하고 있을 때, 가슴 가득 꿈을 품은 홍안의 혜초 사문은 고향, 계림(鷄林)을 떠나 입당구법승(入唐求法僧) 대열에 끼어 대륙으로 향한다. 혜초는 낙양에서 당시 인도의 밀교승으로, 중국 밀교(密敎)의 초조로 꼽히는 금강지(金剛智, 671~741)를 만나는 인연을 맺어 그의 권유에 따라 인도 유학을 결심한다.

723(?)년 한겨울, 혜초는 현 홍콩만의 광저우(廣州)에서 무역선을 타고 수마트라 섬을 경유하여 인도 동부 벵갈만 캘커타 근처에 상륙한 다음 갠지스 강 유역의 불교 성적을 시작으로 오천축국(五天竺國)을 순례한 다음 --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처음 목적이었던 나란다(Nalanda)대학에서의 수학을 포기하고-- 귀국 길에 오른다.

혜초는 간다라 지방을 비롯하여 터키까지에 이르는 중동지방과 서역제국을 두루 순례한 다음 파미르(Pamir) 고원을 넘어 타크라마칸 사막을 경유하는, 당시 유일하면서도 일반적인 동·서간 교통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727년 11월에 당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車)로 돌아와 그의 순례를 마감하였다.

불·보살의 가피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아시아 대륙을 한 바퀴 돌아오는 장장 오만 리에 달하는 대장정을 끝낸 혜초는 당시의 유행대로 순례기를 집필한다. 바로 『왕오천축국전』 전 3권이다. 그가 직접 보고 들은 인도와 서역제국의 실정을 꼼꼼히 기록하였기에 8세기 초 이 지역의 실정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당대에도 이미 중요시 되어 일종의 불교용어사전인 혜림(慧琳)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 85구절의 자구(字句) 해석이 수록되었을 정도였다.

『왕오천축국전』은 이 방면의 대명사로 꼽히는 현장(玄 )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에 버금가는 세계사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아쉽게도 현장, 의정, 법현의 기록이 현재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반면에 우리의 최고(最古)의 이 문화재는 앞뒤가 없는 상태로, 그것도 외국학자의 손에 발견되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 ‘현존본’은 28cm 폭에 총 길이 3.5m의 한지 두루마리에 1행이 약 30자 227행, 총 합계 약 6천 자 남짓 정도가 쓰여진 부분만이 현재 남아 있다. 상·중·하 3권 분량의 전권 중에서 절반에도 못미치는, 일부분만 전하고 있는 셈이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출현 이런 세계적인 보물인 이 두루마리 문헌은 그 출현 자체가 고고학계의 큰 사건이었다. 서역의 동굴 속에서 긴 잠을 자다가 1,200여 년 만에 일대 기연(奇緣)으로 돌연히 인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역의 입구인 뚠황 근교의 천불동 일명 막고굴(寞高窟)에는 4세기 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수많은 동굴사원이 있었는데, 1900년 6월 22일 막대한 양의 유물들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

떠돌이 도사 왕원록(王圓錄)은 16번 굴을 수리하다가 속이 빈 것을 알아내고는 진흙으로 바른 벽을 헐어보니 그 안에서 사방 약 3미터 되는 작은 방이 나타났는데 그 속에 보자기로 싼 수많은 보따리가 가득 놓여 있었다. 주로 경전, 기록, 회화류 등을 비롯한 막대한 유물들이 들어 있었기에 후에 이 방은 제17굴, 속칭 장경동(藏經洞)이라고 불려졌다. 이 유물 중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왕도사에 의해 각지로 흩어졌는데 인기가 없는 경전류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소문을 듣고 달려온 열강의 중앙아시아 탐사대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중에 우리의 국보도 들어 있었다. 여기서 다행이란 표현은 만약 한문학에 밝은 펠리오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휴지로 화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고 불행이라는 의미는 물론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1905년에는 처음으로 러시아의 오브르체프가, 다음으로는 영국의 스타인이, 다음으로는 프랑스의 펠리오가 도착하였다. 그 중 한학에 밝은 펠리오는 굴 속에 틀어 박혀 꼼꼼히 선별하여 29상자를 골라내어 본국으로 가지고 갔고, 그 뒤에는 일본의 오타니(大谷光端) 탐험대가 도착하여 숨겨 두었던 나머지 것들을 모두 가져갔다. 이렇게 해서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숨겨졌던 막고굴의 유물들은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편 펠리오는 그 중에서 앞뒤가 잘려진 두루마리 필사본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 정밀 조사한 후 그것이 바로 『일체경음의』에 이름만 전해오는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이라고 발표하였다. 물론 그는 혜초가 한국인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였지만. 그 뒤 주로 외국학자들에 의해 ‘혜초학’은 연구되다가 드디어 1915년에는 일본의 다카스키(高楠順次郞)가 혜초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혀 내었고 1938년에 폭스(W. Fuchs)에 의해 독일어로 최초로 번역되어 세상에 그 면모를 드러내었다.

현대에 이르러 국내에서도 고병익 박사를 비롯한 국내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어 수십 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되면서 혜초학은 양적으로는 진전이 되었지만 부분만 전하는 본문과 연계 자료의 한계성 때문에 외국학자가 밝혀낸 것에서 큰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많은 부분들이, 특히 혜초의 인적 사항과 그 순례로에 대하여는, 아직도 많은 부분들이 풀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왕오천축국전』은 길에서 탄생된 다큐멘터리이기에 사실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그 의문의 실마리는 그 사실성의 바탕 위에서, 즉 혜초가 걸어갔을 ‘그 길’에서 풀 수가 있을 것이다. 혹 누가 알 것인가? 어둠의 동굴 속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매장경전(埋藏經典)을 신통력으로 찾아내는 티벳의 신비승, ‘퇴르텐’처럼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혹시 목판본 『왕오천축국전』 전3권을 기적적으로 찾아낼 수 있을지….

미완성의 ‘오만 리 길’ 이제 필자는 ‘해동의 나그네’되어 길을 떠난다. 1,200여 년 전, 넓은 세상으로 나간 선구자 혜초가 걸어 갔을 ‘그 길’을 따라, 그가 남긴 절반도 채 남지 않은 두루마리 『왕오천축국전』을 가이드북 삼아, 이제 그의 체취가 남아 있을 그 ‘미완성의 오만 리 길’을 더듬어 보고자 길을 떠난다. 여기에 ‘길’이 있기에, ‘길’은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돌아오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떠나는 것이다. 물론 그 길에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많은 고난이 기다릴 것이므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평생을 우물 안에서 ‘다람쥐 체바퀴질’이나 하면서 이번 생을 허비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혜초가 배를 타고 떠났기에 ‘해동의 나그네’도 우선 그가 천축(天竺)으로 향해 출발한 항구인, 중국 대륙의 남부 광저우 만(廣州灣)으로 가야 하였다. 거기서부터 혜초의 체취를 더듬어 장도의 첫걸음을 내디뎌야겠기에 당장 천축으로 달려가고 싶은 급한 마음을 누르고 우선 인접 도시인 홍콩으로 날아가야만 하였다.

이름난 볼거리로 꼽히는, 구륭 반도에서 바라보는 홍콩섬의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중국인들은 홍콩을 ‘샹캉(香港)’이라고 부르고 쓴다. 그리고 ‘동방의 진주’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자랑스러워 한다.

역사는 때로는 후퇴도 하는 것인가? 전 세계를 휘몰아쳤던 이데올로기란 미친 회오리 바람은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고, 홍콩은 그 역사의 ‘퇴보의 현장’이었지만, 얼마전에 붉은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홍콩의 밤거리는 여전히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바로 기차를 타고 아직도 남아 있는 또 다른 경계선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간을 그은 국경선을 넘어 광저우시로 향했다.

근 10년 만에 와보는 광저우의 변화 역시 놀랄 만하였다. 스스로를 용의 자손이라 믿고 있는 한족의 용트림이 시작된 것 같은, 그러나 서구문명의 획일화된 모방이 분명한 겉모습만의 환골탈태의 변모였기에 별 의미가 없어서 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구항(舊港)으로 달려갔다.

그 곳은 주강(珠江) 하구의 선창장이었는데 수많은 인파와 하역작업 차량들과 노점상들이 한데 얽혀 있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였다. 한참을 그 삶의 현장을 헤집고 다니며 기웃대다가 그 혼돈의 중심권을 조금 벗어난 제방에 걸터앉아 망연히 넓은 강을 바라보았다. 비록 혜초 사문이 장도에 오를 때 탔을 것으로 여겨지는 -크기가 20길(丈)이나 되고 선원이 600명이나 되었다는 - 큰 황포돗대의 범선(帆船)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대로 큰 배들이 정박해 있기도 하고 그 사이로 작은 배들도 들락거리고 있어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항로의 출발지로서 번성하였던 당·송 시대 국제무역항의 면모를 그려볼 수는 있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천축이 있을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일부터 펼쳐질, 아시아대륙을 한바퀴 돌아오는 장장 오만 리 길을 나선 해동의 나그네 가슴에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두려움 반, 설레임 반으로 다가온다. 물가로 내려가서는 장도를 앞둔 ‘해동의 나그네’의 오래된 버릇대로 준비해 간 연꽃초에 불을 당겨 가만히 강물 위에 내려놓으며 기원해 보았다. “불·보살이시여, ‘해동의 나그네’의 앞길에 빛을 밝혀 주십시오!”

김규현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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