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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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난 길
  • 관리자
  • 승인 2007.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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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목소리

펜을 쥔 손으로 턱을 괸 채 물끄러미 내다 본 창 밖엔 어둠이 짙게 드리웠고 희뿌연 가로등 밑으로 보일 듯 말 듯 가랑비가 바람에 흩날린다. 시절에 못이겨 옅어진 나뭇잎을 스쳐가는 스산한 비바람 탓인가. 아니면 아직 인생을 말하기엔 너무 젊어서일까. 다들 잠든 기숙사가 서럽게 조용하고 적적하다.

언제나 그러하듯 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애쓰나 하루가 저무는 시간이 다가오면 항상 아쉽고, 나 자신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늘 부끄럽다.

어쨌든 세월은 나무를 비껴가는 바람처럼 속절없이 흘러 어느새 낙옆 뒹구는 가을이다. 지금쯤 내 고향 지리산 자락 들녘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마을 뒷산의 비탈엔 밤송이가 톡 벌어져 있거나 툭 터져 떨어진 고동색 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것이다. 이 풍요로운 결실의 때에 나는 어떤 수확을 거둘 것인가.

지난 두 해 동안의 옥스퍼드 생활을 돌아보면 학업에 전념하며 그런 대로 열심히 보낸 듯하다. 하지만 한 생각 돌려보면, 너무 지나치게 순간순간의 과정을 소홀히 하고 겉으로 드러날 결과에만 매달려 집착하지 않았나 한다. 그랬다면 나의 삶의 방식을 반성하고 쇄신해야 한다. 이 가을, 내 유학생활의 전반부를 매듭짓고 또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힘차게 나서는 출발점으로 삼고 싶다.

다시 출발선상에 서서 전과는 다르게 나의 길을 걷자. 책 한 페이지에 삶을 걸고 쫓기듯 바득거리지 않았으면 한다. 인생이란 화두를 끌어 안고 먼 여정을 걸어가면서 좀 돌아가면 어때, 조바심을 내지 말자. 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 따위는 지니지 않고, 또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끌어다 놓지도 않고 ‘지금의 이 자리에 의미롭게 살아서 존재’하고 싶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 미래만을 기약하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진 것이고/ 미래는 약속된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살펴 오늘에 충실하라/ 죽음은 바로 내일 찾아올 수도 있다.”

『중부경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 수 한 수 다시 돌이킬 수도 없는 바둑과 같은 인생의 노선, 삶의 매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이 살아 숨쉬는 나’를 위해선 하루 얼마씩이라도 세상이 조용할 때 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야 하고 나의 인생을 해독해 보려는 긴장은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밝아 오면 먼 여행길을 나선다. 종종 기사거리를 보내는 신문사로부터 원고 부탁을 받아 헐(Hull)과 뉴카슬(Newcastle) 지역으로 찾아가는 나흘간의 취재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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