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 스님 수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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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스님 수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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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6.0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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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스님 수행록
저작·역자 김광식 정가 25,000원
출간일 2023-05-25 분야 종교(불교)
책정보

352쪽|판형 신국판(152*225mm) 양장|책등 두께 24mm|

ISBN 979-11-92997-16-2 0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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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명성 스님의 일생은 그 자체가 기념비적인 생애이다”

한국 현대 비구니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명성 스님!

명성 스님의 생생한 구술과 회고로 집대성한 삶과 수행 이야기,

그리고 한국 비구니사를 증명하는 증언사료집!

올해 세수(世壽) 94세인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은 한국 현대 비구니사의 산증인으로서, 현재 조계종 비구니 6,000여 명 가운데 2,200여 명을 길러낸 주역이다. 이 책은 명성 스님이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회고하고 서술한 증언 자료집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스님의 삶 자체가 한국 근현대 비구니 역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친인 관응 스님을 비롯해 탄허, 경봉, 법정, 광우, 묘엄 등 근현대 한국불교사를 빛낸 큰스님들과의 인연담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자료로 새겨진다.

저자소개 위로

명성 스님

청도 운문사 회주 및 한문불전대학원 원장. 1952년 합천 해인사 국일암에서 선행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운문사 승가대학장 및 주지, 비구니 별소 계단 갈마아사리 및 교수아사리, 전국비구니회 회장 및 원로의장을 역임했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 UN 국제여성의 날 ‘탁월한 불교여성상(OWBA), 대원상 포교대상 등을 수상했다.

저자 김광식

동국대학교 특임교수.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부천대 교수, 만해마을 연구실장, 만해학회 회장, 한국정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 근대불교사 연구』, 『한국 현대불교사 연구』 등 40여 권의 저서가 있으며 유심작품상(학술), 불교평론 학술상을 수상했다.

목차 위로

펴내는 글

1부 회고로 본 나의 삶

청소년 시절 꿈을 키우다

선생님이 되어 세상으로 나아가다

해인사에서 입산 출가하다

궁벽 속에서 불법을 배우다

불교정화운동의 현장에서

동학사와 선암사에서 경전을 연구하다

동국대와 청룡사에서 배우면서 가르치다

운문사에서 인재불사에 매진하다

운문사 주지로 불사를 주도하다

전국비구니회장으로 비구니스님들을 이끌다

원력을 회향하다

2부 인연으로 본 나의 삶

관응 _ 선교일여가 되신 큰스님

탄허 _ 학문적으로 자주정신이 강한 어른

자운 _ 존경했던 훌륭한 율사스님

경봉 _ 알기 쉬운 법문을 하신 큰스님

지관 _ 학승으로 회향한 스님

숭산 _ 포교의 열정을 알려주신 스님

법정 _ 수행자의 근본을 추구한 스님

활안 _ 함께 배운 스님

본공 _ 신심이 투철하였던 스님

수옥 _ 나의 학문적인 전통을 제공하신 스님

윤호 _ 오늘의 나를 있게 후원해 주신 스님

광우 _ 존경하였던 선배스님

묘엄 _ 그리운 도반스님

부록

법계명성 스님 연보(年譜) | 비문 | 상패 수상 내역 | 여행일기 수첩 | 세계여행 개요

상세소개 위로

한국불교 비구니 승가의 혁신가이자 살아있는 전설,

명성 스님이 삶으로 펼쳐보인 수행자의 진면목!

청도 호거산 운문사를 세계적인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일궈낸 명성 스님은 한국 비구니 역사의 산증인이자 비구니계의 큰 별로 존경받고 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비구니스님 6,000여 명 중 2,200여 명이 운문사승가대학을 거쳐 간, 명성 스님의 제자이다. 또한 2007년 조계종 명사 법계에 품서되어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UN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탁월한 불교 여성상’(OWBA)을 수상하는 등 세계 불교계의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명성 스님은 1930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1952년 합천 해인사 국일암에서 선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23세 되던 해, 부친 관응 스님이 출가의 길을 권유했던 것이다. 이후 1958년 선암사에서 성능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고, 선암사와 청룡사 강원 강사를 거쳐, 1970년 운문사 승가학원 강사로 취임. 1977년부터 운문사 주지 겸 학장으로 주석하면서 2023년 현재까지 2,200여 명의 졸업생과 23명의 전강제자를 배출하는 등 비구니 수행과 교육에 헌신하였다. 아울러 40여 동에 이르는 전각과 요사채를 신축, 증축, 보수하여 운문사를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교육기관인 운문승가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명성 스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비구니가 비구니로부터 전강을 받는 전통을 만들어, 한국 비구니사(史)에 한 획을 그었다. 1983년 명성 스님은 평소 존경했던 화산당 수옥 스님에게 법제자로 위패 건당을 하면서 자신의 뿌리를 만들고(수옥 스님은 금룡, 혜옥 스님과 함께 근대의 3대 비구니 강백 중 한 사람이다), 1985년 흥륜, 일진 스님 두 제자에게 전강을 함으로써 기둥을 만들었다. 이 전강 의식은 비구니 역사의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비구니사에 기록되었다. 비구니 강사가 배출되어 비구니를 직접 가르치는 여법한 비구·비구니 ‘이부승(二部僧) 제도’가 되살아났으니, 끊어졌던 강맥을 복원시킨 명성 스님의 업적은 더욱 빛을 발했다.

이 책 『명성 스님 수행록』은 명성 스님이 한국 근현대 불교를 관통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직접 생생한 구술로 풀어놓은 회고담이다. 이에 한국 근현대 불교사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김광식 교수가 정리하여, 한국 근현대 비구니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집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 책의 출간은 한국 근현대 비구니사를 바르게 정립하는 동시에, 후학들이 모범으로 삼고 따르고 배워야 할 지남(指南)의 자료를 남기려는 데 가장 큰 뜻이 있다.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해 계승 발전시키고, 나아가 한국불교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가는 데 초석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지금껏 운문사에서 출가자로 50년 이상을 살면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2천여 명이 넘는 제자들이 한국불교를 위해 여러 곳에서 여러 불사를 이어가면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보람은 그 제자들이 이제는 저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육의 보람이고, 스승으로서의 보람이지요.” -본문 중에서

 

책속으로 위로

저자의 말

명성 스님은 한국 현대 비구니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명성 스님의 위상, 영향, 중요성은 널리 알려졌기에 필자는 재론하지 않겠다. 이미 스님에 대한 다수의 저작물이 나왔다. 최근에는 명성 스님의 관련 기록을 묶은 『법계명성 전집』이 나왔다. 그렇지만 필자는 명성 스님의 육성 증언에 의한 회고록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 명성 스님의 이 책은 한국 비구니사 정립의 초석이 될 것이다. 비구니사의 정립은 관련 기록, 문서, 증언, 회고 등이 차곡차곡 쌓이고 집성될 때 가능하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정리한 사료집 출간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이런 사료, 사료집이 다수 생산되고, 그에 의한 연구가 충실하게 추진되어야만 비구니사의 근간이 만들어진다. 이런 기초 작업이 견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비구니사 정립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책은 비구니 증언사료집 정립의 모범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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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속으로

제가 6·25 전쟁이 나고, 휴전이 되기 전에 상주의 시골구석에서 선생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관응 스님께서 남장사로 저를 불러서 조용하게 말씀을 하셨어요. 저에게 출가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신 것입니다. 스님은 저에게 “사람들에게는 여러 길이 놓여 있는데, 출가하는 것도 매우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이 길이 좋지 않으면 권하지도 않는다. 잘 생각해 보거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저에게 『진리』라는 책 열 권을 출가하기 전에 읽어 보라고 주셨지요. 그런 말을 들은 저는 우선 “생각해 보겠습니다”고 하고는 며칠 동안 약간 고민을 하고서 관응 스님에게 출가하겠다는 제 뜻을 말씀드렸지요. 그리 오래 망설이지 않고, 그냥 쉽게 결정했지요. 그러니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가 결심을 했어요. -41쪽

저는 선방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선방에 안 가면서도 화두를 들고 살아야 된다는 인식은 있었지요. 그래서 동산 스님에게 받은 화두를 갖고 새벽과 취침하기 전 한 시간씩은 참선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언제나 그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있는 이곳에 선객들이 다녀가면 촉진제가 돼요. 제자들이 선방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저도 공부가 처지면 안 되거든요. -54쪽

그때 조계사에서 전국 승려대회가 열렸는데 승려대회가 열린 조계사 법당에서 구산 스님이 혈서를 써서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구산 스님의 혈서를 사진 찍은 것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때 조계사에서 정화운동에 참석한 스님 수백 명이 단체로 조계사 법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최근 『불교신문』에 그 당시 정화운동 현장인 조계사 법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는데, 그 사진(1955. 8.)을 자세히 보니깐 저도 그 사진에 나오더라구요. 제가 그런 사진을 찍을 때 빠질 리가 없지요. 정화운동 당시에 비구스님보다 비구니들이 더 많이 참석했습니다. 비구니들이 정화운동에 공로가 많아요. -68쪽

저는 처음에는 재무를 보았지요. 그러다가 강사를 하게 되었어요. 어느 날, 눈이 펄펄 오는데 숯을 굽는 데 가보자고 해서 태경 스님과 함께 험한 산을 올라가 본 적도 있습니다. 만우 스님의 후임으로 오신 성능(性能) 스님이 저에게 강의하는 것을 넘겨주는 전강을 해 주셨습니다. 성능 스님은 박한영의 제자로 해인사와 통도사에서도 강의를 하신 훌륭한 강사이십니다. 어느 날 아침, 당신이 앉으시던 좌복을 중강을 하는 저한테 밀어주는 거예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리고서는 “오늘부터는 여기에 앉아서 강의를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좌복 하나 받은 것이 전강의 전부에요. 성능 스님께서 보여 주신 그날의 전강 자리는 그 어떤 호화로운 것보다 더한 것이었습니다. 내게는 그래서 더 무겁고 고귀하여 가슴 벅찬 자리였다고 생각합니다. -87쪽

청룡사는 본래 정업원(淨業院)이라고 해서 궁중하고 관련이 깊고, 조선 시대 이래로 비구니 사찰입니다. 제가 거기 머물면서 강원이 생긴 것이지요. 제가 대학원을 마치고 운문사 강사로 내려갔던 1970년까지 거의 10년간을 가르쳤습니다. 청룡사에서 배우던 스님은 혜은 스님, 진홍 스님, 성호 스님, 계호 스님 등입니다. 그때 청룡사 주지인 윤호 스님의 도움이 아주 컸습니다. 그때 비구니회장을 한 명우 스님도 거기에서 같이 살면서 나에게 배웠지요. -103쪽

제가 운문사로 내려가려는 그때 제 지도교수인 김동화 박사님이 저에게 원시불교를 맡아서 가르치라고 그랬어요. 그래도 저는 내려간다고 하니깐, “시골에서의 공부는 서울에서 낮잠 자는 거와 같다”는 말씀까지 하시면서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저는 “동국대 강의는 일반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운문사 비구니 교육에 더 중요성을 느낀다”고 말씀을 드리고 내려왔지요. 제가 안 내려가면 비구니 강원이 문을 닫는 상황인데, 그리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나선 것이지요. -110쪽

제가 여기 운문사 강사로 올 때가 마흔 살이었습니다. 그때 강사로 내려오면서 새롭게 강원 교육을 할 시책을 갖고 왔어요. 강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일선에 나가서 교법을 유포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추어 져 있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구태의연한 교과목 개편을 과감하게 시도했지요. 저는 겸학을 강조했어요. 내전과 외전을 다 배워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현시대에 적응하는 교육을 시켜야 되겠다는 것이었죠. 수행도 잘해야 하겠지만, 수행의 이면에는 모든 것을 박학(博學)으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현시대 사조에 적응하는 교육을 시도했어요. 그때 저는 한국의 운문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운문사, 국위 선양을 하는 운문사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우물 안 개구리는 되지 말자고 했지요. -114쪽

우리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 아닙니까? 그런 여성을 우리 비구니스님들이 담당해서 교화를 해야 합니다. 우리 비구니들은 일체중생의 어머니인 관세음보살의 자비 사상을 발휘해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실 생활에 전달할 수 있는 의무와 사명감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135쪽

제가 한 일을 갖고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청룡사에서 우담바라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강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그 전에 청룡사에서 비구니들의 자주적, 자생적인 수행 흐름이 조성되었어요. 제가 『사미니율의』를 펴내고, 비구니 200여 명에게 수계를 하도록 주선했습니다. 이런 것도 차후에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164쪽

비구니회장으로 하였던 일 중에서 보람이 있는 것은 비구니스님들의 평가, 복원 작업을 한 것입니다. 한국 비구니의 수행 전통이라는 포럼을 하고, 거기에서 발표된 글을 모아서 책을 냈어요.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을 두 권을 펴냈지요. 제가 회장을 할 때 그런 가치가 있는 책을 낸 것을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170쪽

부처님이 장부(丈夫)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장부라면 비구스님뿐만 아니라 우리 비구니스님도 장부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비구니스님들은 섬세하고, 자비스러워요. 관세음보살과 같은 자비 사상을 갖고 여성 불자를 포함한 신도들을 제도해야 합니다. 모든 신도를 교화할 수 있다는 신심, 능력,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비구니스님들은 실력이나 여건 등 모든 방면에서 전 세계 불교 여성 수행자들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장부(丈夫)이면 나도 장부’라는 당당한 마음, 자긍심을 갖고 수행과 포교를 이끌어 가는 비구니스님이 되길 바라지요.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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