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 서양미술사학자의 관점으로 보는 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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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 서양미술사학자의 관점으로 보는 반가사유상
  • 노성두
  • 승인 2023.05.2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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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의 조형성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Domenico Ghirlandaio)의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in His Study)>, 위키미디어 공용

서양의 ‘생각하는 사람들’

반가사유상은 반가의 자세로 사유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6~7세기경 꽤 유행했고, 현재 30점 정도 남아 있다 한다. 서양에서는 고대 유물이 기독교에 의해 파괴되고 1% 남짓 남아 있다고 추정한다. 우리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비슷하게 계산하면 한때 한반도에 반가사유상이 3,000점 정도가 제작됐다가 현재 30점 남았다고 볼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종교 미술이다. 그러니까 ‘사유’도 단순한 ‘생각’이나 ‘고민’과는 차원이 다를 것 같다. ‘오늘 점심 뭐 먹지?’, ‘ 메뉴 고르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 이런 식의 고민은 종교적 사유와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양미술에도 생각이나 고민에 잠긴 주제나 소재가 꽤 있다. 종교의 빛을 찾는 사유와는 결이 한참 다르겠지만, 주제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독특한 자세나 표정이 고안됐고, 조형적으로 정착됐다. 

‘생각’ 또는 ‘고민’에 빠진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다음 세 가지가 가장 많다. 첫째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 마리아가 출산할 때나 갓난아기를 요람에서 돌보는 장면에서 아버지 요셉은 쭈그렁이 할아버지 모습으로 그림 한 귀퉁이에 힘없이 앉아서 턱을 괴고 있다. 여기서 턱을 괴는 자세가 ‘생각’의 도상이다. 한편, 젊은 새댁 마리아와 나이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할아버지로 요셉을 표현하는 이유는 마리아의 순결과 무원죄 잉태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물론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다음에 동생을 여럿 생산했다. 요셉도 나름대로 구실을 제대로 한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회 제단화로 걸리는 종교화에서 어리고 순결한 마리아 옆자리에 근육질의 마초 맨이 ‘등빨’을 뽐내고 있다면 그것도 꼴불견일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종교화에서 요셉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무한정 늘어나게 된다. 

두 번째는 성 히에로니무스다. 1,600년 전 히브리 성서를 라틴어 성경 『불가타(Vulgata)』로 번역한 대학자다. 요즘도 가톨릭에서는 성 히에로니무스 번역을 정경(正經)으로 사용하고 있다. 번역이 얼마나 뼈를 갈아 넣으면서도 돈 못 버는 작업인지는 누구나 잘 알 것이다. 필자도 통산 100권 넘게 번역하면서 인생 탕진해 봐서 알고 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종교화에서 노상 이마 기름을 쥐어짜면서 턱을 괴고 있는데, 이건 번역이 잘 안 풀려서 그런 것 같다. 어쨌든 미술 주제로 자주 나오니까 끼워준다. 

세 번째는 멜랑콜리아. 멜랑콜리아는 서양미술의 주제로 다뤄질 때는 대개 ‘예술가의 창조적 우울’을 의미한다. 예술가는 힘써 작품을 탄생시키지만, 창조주가 생명을 부리는 솜씨는 따를 수 없다. 창조주가 지어낸 피조물인 자연을 모방하면서 창조의 흉내를 내기는 한다. 하지만 예술가와 창조주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간극에 절망한다. 그것이 창조적 우울, 곧 멜랑콜리아인데, 턱을 괴는 자세가 특징이다. 표정도 어둡고 이맛살도 세게 잡으면 멜랑콜리아 도상 완성.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을 서양미술의 ‘생각’ 도상 세 가지와 비교하면 공통점이 있다. 턱을 괴는 자세다. 물론 서양에서는 주먹을 쥐고 턱을 괴거나, 손바닥을 펴서 뺨에 붙이거나, 자세들이 무척 다양하다. 손이나 주먹으로 턱을 괴는 건 안면 지압 효과도 있겠지만,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무겁다는 의미일까. 가끔 반가사유상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하는데, 로댕 조각은 제목만 ‘생각하는 사람’이고, 사실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라고 불러야 맞다. 지옥문 상인방 벼랑에 걸터앉아서, 자기가 둘러본 지옥의 풍경과 장면들을 머릿속에 되새김질하는 이탈리아 시인 단테를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생각하는 사람이 단테 맞아? 근데 단테가 왜 옷을 홀랑 벗고 있어?’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머리 부분을 잘 관찰하면 ‘시인의 가죽 모자’를 머리에 덮어쓰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 말고도 서양 조형에서 옷 벗은 알몸이나 누드가 자주 나오는데, 의미는 여러 가지다. 가령 로마 콜로세움 옆에 서 있던 네로 황제의 거상이 알몸이었는데, 이건 ‘영웅적 누드’라고 부른다. 헤라클레스도 그래서 옷을 잘 안 입는다. 또 헤르메스, 아폴론 비너스의 누드는 ‘신성한 누드’, 아담과 하와(이브), 세례받는 예수의 누드는 ‘순결한 누드’, 알몸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진실의 알레고리는 ‘벌거벗은 진실’ 곧 ‘진실의 누드’, 그 밖에 욕정에 불을 댕기는 팜파탈의 음란 또는 ‘유혹의 누드’가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다섯 가지 누드 가운데 영웅적 누드로 분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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