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 차차차茶茶茶] 茶와 선시禪詩
상태바
[산사에서 차차차茶茶茶] 茶와 선시禪詩
  • 동명 스님
  • 승인 2023.04.26 15: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와 시는 최고의 풍류風流

출가하기 위해 은사스님이 소개한 대로 해인사 강주 법진 스님을 찾았을 때 강주스님이 내게 말했다. “출가는 일생에 한번 해볼 만한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출가하면 잔재미는 없습니다. 세속인에게는 가족들과 오순도순 만들어 가는 소소한 재미가 있지만, 출가자에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죠?”

잔재미에 대한 기대는 추호도 없었지만, 그 말씀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출가한 내게도 잔재미가 쏠쏠하게 있었으니, 그것은 차 마시는 것이었다. 불광사에서 살 때 옆방 스님들과 차 한잔 마시면서 담소 나누는 것이 참 좋았고, 동명사에서는 아침 공양 후 대중스님들이 모두 모여 차 한잔하는 맛이 기가 막혔다. 중앙승가대에서 입승 소임을 볼 때도 도반스님들이나 아랫반 스님들이 찾아오면 차 한잔 대접하며 담소 나누는 것이 더없는 재미였다. 차 마시는 것은 술 마시는 것처럼 2차, 3차 이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지만, 동국대 선학과에서 종강 모임을 한 후에는 장소를 바꿔가며 3차까지 차를 마신 적도 있다. 그러나 옛 선사들이 차를 소재로 쓴 시를 보니, 선사들에게 차는 단순한 잔재미가 아니라 엄청난 풍류요, 필수적인 화두였으며,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아름다움이었고, 무엇보다도 시였다. 금강선원의 혜거 스님은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스님의 『영가집』을 강의하면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시를 따라갈 풍류는 없다”라고 말했다. 옛 선사들의 시를 읽으니, 차가 있는 곳에 시가 있었고, 시가 있는 곳에 차가 있었다.

 

다반사(茶飯事)가 도(道)

다반사라는 말이 있다. 중국은 물이 좋지 않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맹물을 그냥 마실 수 없어 늘 차를 마셨다. 중국인들에게는 차를 마시는 것이 밥 먹는 것보다 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처럼 ‘늘 예사로 있는 보통 일’이라는 뜻에서 다반사(茶飯事) 또는 항다반사(恒茶飯事)라는 말이 생겼다.

중국인들에게 차를 마시는 것은 특별한 낭만은 아니었을 텐데, 당나라의 노동(盧仝, 795?~835?) 같은 시인은 차를 특별히 좋아하여 「칠완다가(七碗茶歌)」 같은 차 예찬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차에 관한 선시는 우리나라에서 더욱 크게 꽃피었으니, 우리 선사들에게는 차야말로 시와 더불어 최고의 풍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를 자주 마시지 않는다는 점에서 ‘늘 예사로 있는 보통 일’이라는 의미의 다반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선승들에게는 차가 일상이었다. 

새벽에는 한 국자의 죽

점심에는 한 그릇의 밥

갈증엔 석 잔의 차 마시면 그뿐

깨닫거나 말거나 관여치 않는다오

寅漿飫一杓 午飯飽一 渴來茶三椀 不管會有無

- 복암충지(宓庵冲止, 1226~1292), 「한 선자에게 답하다(有一禪者答云)」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라는 한 수행자의 질문에 대한 충지 스님의 대답이 바로 위 시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에는 밥을 먹으며, 갈증 나면 석 잔의 차를 마신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조 스님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그야말로 쉽고 간명한 시로 표현한 것인데, 평상심보다 더욱 평범한 다반사(茶飯事)가 바로 도라고 답한 것이다. 또 충지 스님은, 산중에서 하는 일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한 발우 나물에 한 사발 차라고 대답하리”(「한시랑이 내가 조계의 법통을 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보내 축하하기에 차운하여 답하다(韓侍郞 聞予嗣席曹溪 以詩寄賀 次韻答之)」)라고 말한다. ‘한 발우 나물’은 소박한 식사를 말하고, 그 소박한 식사에 약간의 호사를 누리는 것이 ‘한 사발 차’이다. 차를 마시는 것만 일상인 것이 아니었다. 차를 심고 만드는 것도 일상이었다. “동자는 땔나무를 지고 와 햇고사리를 삶고/ 노승은 삽을 들어 햇차를”(백곡처능, 「봄날에 임 대사에게 보내다(春日寄林師)」) 심어서, “아무도 부른 사람 없건만/ 보살들이 찾아와서 산차를 따고”(나옹혜근, 「차를 따다(摘茶)」), “비 막 갠 곡우 날에 따낸/ 펴지지 않은 노란 차 싹을/ 빈 솥에 정성껏 덖어내어/ 밀실에서 잘 말려서”(범해각안, 「초의차(草衣茶)」) 죽순잎으로 깔끔하게 포장하면, 향기로운 차가 완성된다. 선사들은 이처럼 차를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차를 만드는 것도 일상이었다. 이것들이 모두 수행의 과정이었음은 물론이고, 충지 스님의 시에서처럼 깨닫거나 말거나 차를 만들고 마시는 일상생활만으로도 충분한 수행이라는 것이 선사들의 마음이었다. 

 

차와 선정 사이, 차와 우정 사이

그러나 차 마시는 것이 수행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고 노래하는 선시도 많다. 차는 각성 효과가 있어서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중심인 참선 수행에 차는 큰 도움이 된다. 

시냇가에서 뜯은 푸성귀 천천히 익히고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