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습니다] 거듭거듭 낱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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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습니다] 거듭거듭 낱낱이
  • 윤남진
  • 승인 2022.12.2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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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중의 새벽은 바지런 떨며 수확 끝낸 밭을 바라보듯 허허롭고 한가하여 자못 고요하기만 합니다. 생명이 한창 푸르게 약동하던 여름날의 새벽, 그 이름 모를 수많은 산짐승과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어느 한순간 일제히 멎었습니다. 나뭇잎과 풀잎들도 꼿꼿하게 섰던 기운이 빠지고, 이젠 메말라서 서로 사각대는 것이 세월의 한 켠이 속절없이 부스러지는 듯 들립니다. 

왕성한 생명의 기운이 활동을 그치고 돌연히 침잠해가는 시간은 기도로 채우기에 안성맞춤일 때입니다. 뭇 생명들이 열매를 거두었으니 이제 사람들의 삶에서도 어떤 결실을 보아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지나간 계절을 허송세월했다손 치더라도 하얀 백지로 새롭게 출발할 겨울을 앞에 두고 한 점 씨앗은 품어두어야 하겠기에 기도는 더욱 간절합니다. 가을의 정적이 깊어지며 몸은 웅숭그려지고 마음이 고독감으로 빠져들면서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나와 함께 떠올리면서 하는 기도가 됩니다.

 

새벽, 홀로, 그리고 관세음보살 정근

홀로 새벽예불 말미에 관세음보살 정근을 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나서는 날이 밝을 즈음까지 붓을 들어 사경을 합니다. 염불 기도에 아이들을 위한 축원을 염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자 시험공부를 하는 큰아이를 생각하며 시험을 앞둔 자녀를 둔 그 많은 사람처럼 ‘학업성취’를 기원합니다. 대안학교를 나와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마당극 마을을 찾아가 이제 마당극 배우로 갓 출발한 딸아이를 위해서는 늘 만족스러운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말수가 거의 없는 막내 아이를 위해서는 분발하는 마음을 크게 한번 내어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축원하면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합니다.

‘염념물생의(念念勿生疑).’ “염할지라 염할지라 의심 말지라.”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이르고 있는 관세음보살 염불의 정신입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 한마디를 오롯이, 또렷이 하기를 힘쓰며 반복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를 마무리하며 아이들을 위한 축원을 떠올리는데 어떤 생각의 변화가 일어남을 느낍니다. 큰아이의 학업성취 기원은 그 아이가 다른 이들의 학업을 성취시켜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하루하루 만족하기를 바라는 기원은 다른 이들과 하루하루 만족한 삶을 함께 만들고 함께 누리는 공동체 성원이 되기를, 스스로 분발하는 마음을 내기를 바라는 축원은 다른 이를 분발케 하는 훌륭한 상담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파장이 더 커지고 넓어지는 것을 깨닫습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아가 그가 다른 이들을 ‘그렇게 되게 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스스로가 ‘작은 관세음보살’이 되기를 바라는 서원으로 변화되는 것을 봅니다. 이런 변화는 어떤 일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거듭거듭’의 힘, ‘반복’의 효과가 끌어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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