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쿡의 선과 정토] 무상선(無相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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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쿡의 선과 정토] 무상선(無相禪)
  • 현안 스님
  • 승인 2022.09.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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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쿡의 선과 정토 이야기(59)]
출처 셔터스톡

출가 전 한국에 왔을 때 꽤 많은 사람이 물었습니다. “어떤 명상법으로 수행하나요?”, “위빠사나를 하나요?”, “참선을 한다면 화두를 하는 건가요?”, “묵조선으로 하는 건가요?”. 이런 질문을 받기 전까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순간 얼어서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머리만 긁적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 스승님이신 영화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한국에 갔더니 무슨 수행법으로 하는지 사람들이 물어봤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분명 그냥 단순히 결가부좌만 하고 있는 건 아닌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때 영화 스님은 “대답을 못한 게 당연하지.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건 무상선이기 때문이야. 상(모양)이 없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배우고 수행하는 것은 첫째로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저는 10여 년간 영화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면서 힘을 얻었고, 그 힘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더 선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겠지만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결가부좌 명상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결가부좌로 오래 앉는 걸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에게 영화 스님은 늘 어려운 숙제를 던져줬습니다. 그때마다 선택해야 했습니다. 선화 상인이 말씀하신 대로 어려운 숙제를 하는 과정에서 모든 게 시험이었습니다. 명상반에서 학생들에게 우선 결가부좌로 앉으라고 하는 것도 여러 가지 시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결가부좌와 같이 말도 안 되고 힘든 자세로 수련할 의지와 용기가 있는지 보는 겁니다. 그래야 점점 더 어려운 숙제를 줄 수 있으니까요.

어렵고 힘든 시험을 겪을 때마다 필요성에 의해서 더 열심히 수행해야 했습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했습니다. 잘 앉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했고, 실패해도 계속 다시 도전했습니다. 스승님의 어려운 과제를 해내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번뇌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 무슨 복인지 영화 스님은 저에게 많은 가르침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행에서 진전해왔습니다. 예전보다 더 강해져서,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우리 위앙종에선 어느 특정한 법의 문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건 본래 중국에서 ‘상 없는 선’이라 부릅니다. 즉 ‘무상선(無相禪)’, 영어로 ‘Markless Chan’이라고 합니다. 일본인은 ‘문 없는 선’ 즉 무문선이란 말을 쓰길 좋아합니다. 하지만 본래 이건 ‘무상선’입니다. 선화 상인께서 미국으로 가져간 선은 진실로 무상선입니다. 그렇다면 무상선은 뭘까요?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학교에 갑니다. 그 선생님이 “우리는 명상할 때 호흡을 셉니다.” 그건 무문선인가요? 무문은 법의 문이라고는 전혀 어떤 것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명상을 배우는데 반드시 호흡을 세야 한다면, 그건 어떤 법의 문(Dharma door)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건 무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대승의 선이 아닌 겁니다.

또는 여러분이 참선하는데, 반드시 화두로만 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무문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수행을 위해 화두라 불리는 것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스승이 부처님의 명호를 외는 것만 고집한다면, 그건 어떤가요? 그게 문이 없는 선일까요? 아닙니다. 그것도 어떤 한 가지 수행법 즉 법의 문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무문선은 문이 없는 선이란 의미입니다. 달리 말해서 그건 어떤 방법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법의 문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출처 셔터스톡

예를 들어 결가부좌로 앉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겁니다. 만일 화두를 하고 싶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진언을 외고 싶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어떤 특정한 수행법 즉 법문에도 집착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이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학교를 골라야 하지 않나요? 그 학교에서 아마도 박사과정, 박사 후 과정을 제공할 수도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 이유로 어떤 특정한 학교를 선택하는 겁니다.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을지 고려할 때 말입니다. 명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게 다 똑같진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명상을 배울 때, 그 방법이 여러분을 얼마나 멀리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 그게 여러분에게 명확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똑똑하다면 미래를 위한 아무 계획 없이 아무 학교에나 막 가진 않을 겁니다. 선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명상 지도자는 그걸 명확히 해야 합니다. 모르고 무작정 따라갈 수는 없는 겁니다.

아무튼 무문선은 “문이 없는 선”이란 뜻이고, 그건 어떤 특정 법문(Dharma door, 대략 수행법을 뜻함)에도 집착하지 않는 걸 의미합니다. 그건 여러분이 모든 걸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걸 배우고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무문선과 무상선은 어떻게 다른가요? 무상선은 우리가 수행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수행하고 있다는 걸 전혀 보지 못하는 겁니다. 겉으로는 빈둥거리는 걸로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릴 보고 명상을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수행해서 더는 명상의 형태를 갖고 있지 않는 지점까지 이르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무문선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여전히 “문이 없다”는 것에 집착이 있습니다. “상이 없다”면 “난 신경 안 써, 난 더는 신경 안 써”라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가 훈련시키는 선 수행법에 상 즉 형상이 없는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화두도 모르고, 염불도 잘하지 못합니다. 영화 스님의 곁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왔습니다. 스승님의 지침에 따라서 결가부좌의 아픔을 견디고, 단식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참았습니다. 스승님의 곁에서 지내면서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지는 것들,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일해야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해야 했습니다. 일하는 것도 선입니다. 앉는 것, 눕는 것, 걷는 것, 일하는 것이 모두 선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좌선이나 염불을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모두 다 하는 겁니다.

*참고 법문: 영화 스님의 대승 법문 ‘모든 게 시험이다. 무상선’(2018년 4월 28일)

 

현안(賢安, XianAn)
2012년부터 영화 선사(永化 禪師)를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2015년부터 미국에서 명상을 지도했다.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 후 스승의 지침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정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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