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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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 유근자
  • 승인 2022.08.2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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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세종도서 학술부문 선정 |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 조선의 왕실발원 불상에서 인간의 드라마를 읽어 낸다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저작·역자 유근자 정가 80,000원
출간일 2022-08-11 분야 불교 학술
책정보

판형 신국판 (150×225mm)|두께 48mm | 1,000쪽 | ISBN 979-11-92476-13-1 (9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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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9월 13일이 탄신일이신 주상전하 갑술생 이씨[영조] 보체께서는

계계승승 이어지며 수명이 만세를 누리시길 바라옵고,

12월 초이레가 탄신일이신 왕비전하 임신생 서씨[정성왕후] 보체께서는

수명이 나란히 주상과 같으시기를 바라오며,

정월 21일이 탄신일이신 세자저하 을묘생 이씨[사도세자] 보체께서는

오래오래 수명이 천추(千秋)를 누리시길 바라옵니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

조선의 왕실발원 불상에서

인간의 드라마를 읽어 낸다

조선시대는 흔히 국가적인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침체되었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조선 왕실은 왕실 인물의 생전 안녕과 사후 극락왕생을 염원하며 여러 불상을 조성했다.

조선 왕실은 불상・불화・범종의 조성, 경전 간행, 불전 건립을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 등이 직접적으로 사찰 불사에 동참한 경우도 있고, 왕자와 공주 및 그 배우자가 참여한 사례도 있다. 이 외에 왕실의 종친, 왕실과 사찰 간의 매개자 역할을 했던 상궁의 동참도 눈에 띈다.

이 책은 왕실 발원으로 조성된 불상의 복장(腹藏) 유물 및 여러 관련 문헌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이 책의 1부는 조선시대 왕실 발원 불상에 대한 총론이다. 조선시대를 조선 전반기(1392-1608), 조선 후반기 제1기(1609-1724), 조선 후반기 제2기( 1725-1910)의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시대 왕실 발원 불상의 전반적인 흐름을 개관한다.

이 책의 2부는 저자가 직접 참가한 왕실 발원 불상 복장 조사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2부의 각 장은 강릉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목조제석천상,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 봉원사 명부전 존상, 서울 옥수동 미타사 아미타삼존불좌상, 오대산 상원사 영산전 존상, 흥천사 노전 석조약사여래좌상, 그리고 화계사 불교미술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조선 왕실과 불교의 관계를 흥미롭게 규명한다.

이 책은 왕실 발원 불상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하여 필자의 전작인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를 확장시킨 것이다.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소통한 조선 불교의 모습이 이 책의 풍부한 자료와 다채로운 사진을 통해 경이롭게 펼쳐진다.

저자소개 위로

유근자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단법인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불교미술 전공 강의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강원도・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편,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 기록과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한 간다라 불전미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가 있고, 공동 저서로 『간다라에서 만난 부처』와 『치유하는 붓다』가 있다.

목차 위로

화보로 보는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 ‥4

일러두기 ‥14

발간사 ‥24

머리말 ‥27

1부. 조선시대 왕실 발원 불상의 시대 구분

1장. 조선 전반기(1392-1608) 왕실 발원 불상

1. 머리말

2. 보령 금강암 석조미륵보살상

3. 대구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4. 견성암 약사삼존상

5.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상

6.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

7. 경주 왕룡사원 아미타불상

8. 합천 해인사 법보전과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상 중수

9.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불상군

10. 남양주 수종사 불상군

11. 맺음말

2장. 조선 후반기 제1기(1609-1724) 왕실 발원 불상

1. 머리말

2. 서울 지장암 비로자나불상,

칠보사 석가불상, 선찰사 석가불상

3. 남양주 수종사 불상군

4.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

5.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6. 오대산 상원사 목조제석천상 중수

7. 서울 봉은사 석가여래삼불좌상

8. 순천 송광사 관음보살상과 석가불상

9. 구례 화엄사 각황전 불상

10. 서울 봉원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11. 서울 옥수동 미타사 아미타불상

12. 맺음말

3장. 조선 후반기 제2기(1725-1910) 왕실 발원 불상

1. 머리말

2. 대구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상 중수

3. 남양주 불암사 목조석가불상 중수

4. 서울 사자암 목조아미타불상 중수

5. 서울 봉은사 목조사천왕상

6.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신불상 중수

7. 인제 백담사 목조아미타불상

8. 서울 옥수동 미타사 관음보살상

9. 화성 용주사 목조석가여래삼불상

10. 서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 중수

11. 서울 흥천사 약사불상

12. 맺음말

2부. 조선시대 왕실 발원 불상의

복장 유물과 조성·중수발원문의 분석

1장 강릉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의

복장 유물과 중수발원문의 분석

1. 머리말

2.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의 현상 및 특징

3.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 유물

4.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의 중수발원문 분석

5. 맺음말

2장.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목조제석천상

1. 머리말

2. 오대산 신앙과 불교 존상

3. 상원사 목조제석천상의 복장 유물 분석

4. 상원사 목조제석천상의 중수발원문 분석

5. 상원사 목조제석천상의 양식 특징과 편년

6. 맺음말

3장.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조성기 「施主秩」 분석

1. 머리말 ‥580

2.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施主秩」 구성과 내용

3.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施主秩」 분석

4.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제작 시기

5. 맺음말

4장.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의 조성과

벽암 각성(碧巖覺性)

1. 머리말

2. 청량산 원암사의 화재와 완주 송광사의 중창

3. <송광사개창비>(1636년)와

<안심사사적비>(1759년)로 본 17세기의 완주 송광사

4. 조선 왕실 인물과 완주 송광사의 17세기 불사

5. 17세기 완주 송광사의 불사와 벽암 각성의 역할

6. 맺음말

5장. 봉원사 명부전 존상(1704년)의

복장 유물과 발원문 분석

1. 머리말

2. 봉원사 명부전 존상의 복장 유물

3. 봉원사 명부전 존상의 조성발원문 분석

4. 봉원사 명부전 존상의 이운(移運)

5. 맺음말 ‥721

6장. 서울 옥수동 미타사 아미타삼존불좌상의

복장 유물 분석과 양식 특징

1. 머리말

2. 미타사 아미타삼존불좌상의 복장 유물 현황

3. 미타사 아미타삼존불좌상의 복장 기록 분석

4. 미타사 아미타삼존불좌상의 양식 특징과 편년

5. 맺음말

7장. 오대산 상원사 영산전 존상의 복장 기록 분석

1. 머리말

2. 오대산 상원사와 나한신앙

3. 상원사 영산전 존상의 복장 기록

4. 상원사 영산전 존상의 복장기록 분석

5. 맺음말

8장. 흥천사 노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순원왕후

1. 머리말

2. 흥천사 노전 석조약사여래상의 복장 유물

3. 순원왕후 발원 흥천사 석조약사여래상의 도상

4. 맺음말

9장. 화계사 불교미술의 성격과 시주자

1. 머리말

2. 화계사 불교미술과 왕실의 관계

3. 화계사 명부전의 불교미술

4. 화계사 불교공예의 성격

5. 화계사 대웅전 삼존불상의 존명

6. 화계사 불교회화의 조성과 이동

7. 맺음말

맺음말: 복장 기록으로 보는 조선 왕실 발원 불상 연구

참고문헌

저자의 말 위로
조선시대 왕실과 관련된 불상들은 생전의 병 치유 및 사후의 천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병을 치유하는 것은 약사신앙 및 관음신앙과 주로 연관되었고, 사후의 명복을 기원하는 것은 아미타신앙과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세조와 단종, 광해군과 영창대군,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에 벌어진 왕실의 권력 싸움이나, 영조 시대의 당쟁에서 비롯된 사도세자의 죽음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은 사찰과 왕실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뒤, 패배한 쪽에서는 불교로 위안을 받고자 불상을 조성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 ‘머리말’ 중에서
책속으로 위로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상이 1447년(세종 29)에 중수된 것은 소헌왕후의 1주기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소헌왕후는 1446년(세종 28) 음력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1주기를 맞아 아들 영응대군 이염, 신빈 김씨, 영해군 등이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상을 중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_ 68쪽

세조는 의경세자의 병 치유를 위해 여러 조치를 했다. 1457년 7월에는 승려 21명을 초청해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설행했다. 동년 8월 2일에는 김수온 등을 각지에 보내 향과 축물을 내려 세자의 병 치유를 기도하게 했다. 동년 8월 4일에도 승려 4명을 내전 서청(西廳)에서 기도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경세자는 동년 9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_ 92쪽

“조선 국왕 이(李)는 삼가 선왕・선왕후와 조종의 영(靈)과 죽은 아들 의경(懿敬)이 극락에 오르고 아울러 법계 중생의 해탈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위하여 대장경 50건을 인쇄하고 표지는 이미 끝났으므로 이달 10일에 해인사에서 법회를 특설하기로 했습니다. …… 그러나 공사가 막 끝나고 고승들을 초빙해 펼쳐보게 되니, 공전(空前)의 법연(法筵)은 하늘이 열었고 일대(一代)의 아름다운 설법은 샘이 불어난 듯하여, 진실로 대승을 판별할 수 있고 묘력(妙力)을 힘입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선왕 열성(列聖)의 영과 죽은 아이와 고혼의 무리가 직접 대자대비의 제도를 받아 극락세계에 오르고 속히 정각의 힘을 이루어 상적광토(常寂光土)에 들어서, 일체의 번뇌를 모두 버리고 그지없는 복을 널리 받아지이다. 경건히 기도하는 마음 금할 길 없어 삼가 아룁니다.” _ 93-94쪽

세조는 1466년(세조 12) 상원사 중창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왕족을 비롯한 중요 대신들을 거느리고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 등을 둘러본 후 양양 낙산사를 거쳐 오대산 상원사에 도착했다. 상원사 낙성식에는 세조・왕비・세자・효령대군 등을 비롯한 종친과 영의정 신숙주(1417-1475), 상당군 한명회(1415-1487) 등 수많은 관료들이 참석했다. 이 중창 법회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상원사 문수전 목조문수동자상이다. _ 128쪽

세조는 상원사 중창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인 어첩(御牒)에서 자신을 ‘불제자’로 칭하고 있다. 억불숭유 정책를 폈던 조선에서 스스로를 불제자라고 칭한 왕은 세조뿐이다.199 조카인 단종과 동생인 안평대군・금성대군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심신의 병이 깊어지자 불제자를 자처할 정도로 절박하게 불력에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_ 129쪽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불상 조성에 참여한 효령대군은 조선 전기 왕실 주도 불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 조선 전기 불상 가운데 효령대군과 관련이 있는 불상은 견성암 약사삼존상(1456년),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상(1458년) 그리고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불상(1466년)이다. 효령대군은 왕실 어른으로서 불력(佛力)에 의지해 선왕・선후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한 불상 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_ 145쪽

“주상은 애통해하였고 자전(慈殿, 명성 왕후)은 더욱더 상심함이 끝이 없었다. 저승길에 명복을 비는 데 부처만한 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_ 280쪽

인목대비가 조성 발원한 수종사 불상의 미소 띤 얼굴은 조선 전기 불상의 근엄한 모습이나 조선 후기 불상의 경직된 이미지와는 다르다. 이 불상들은 머리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고 어깨와 하체는 좁고 낮아 신체 비례의 균형이 맞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같은 형상의 불상을 조성한 이유는 가슴에 묻어 둔 영창대군의 모습을 불보살상에 반영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_ 294쪽

백담사 아미타불상 조성발원문에는 영조와 정성왕후 서씨(1693-1757), 그리고 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있다. 또한 당시 강원도 관찰사였던 홍봉조(洪鳳祚)와 평강 태수였던 유언술(兪彦述)도 관직이 오르고, 살아서 정토를 맞기를 발원했다. 만(卍)자가 새겨진 노랑 삼회

장저고리는 궁중에서 사용했거나 왕실과 관계된 사람의 것으로 추측된다. 18세기 불상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백담사 아미타불상은 당시 불상 가운데 빼어난 작품으로 18세기 불교조각을 연구하는 데 기준작이 된다. _ 441쪽

“삼가 주상전하께서는 장차 남산 같은 수를 누리시기를 바라오니 운수가 어찌 백 년 천 년에 그치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영원한 안녕을 살피옵건대 국운이 틀림없이 만 년 억 년에 이를 것입니다.” _ 455쪽

미타사 아미타삼존상은 조성 시기가 각기 다른데, 본존인 목조아미타불좌상은 1707년에 숙종의 후궁 소의 유씨(昭儀 劉氏, ?-1707)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왕실 인물과 관련된 불상이다. 미타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금속제 후령통은 1707년(숙종 33) 조성 때 납입된 것이고, 1744년(영조 20) 중수 때 납입된 것은 한지에 싸여 있어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의 복장 납입법과 유사하다.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도 왕실과 관련된 것으로, 조선시대 왕실 발원 불상의 조성과 중수 때의 복장 납입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_ 494쪽

세조의 딸 의숙 공주와 그녀의 남편 정현조가 지혜로운 아들 낳기를 발원하면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을 조성했다면,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남편의 병 치유와 딸 내외의 득남을 위해 1466년에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을 중수하였을 것이다.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의 황초폭자와 금속제 후령통은 1466년에 조성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의 후령통 및 후령통 내부 물목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때 납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_ 498쪽

상원사 목조제석천상 중수발원문(1645년)에서 가장 주목되는 내용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소현세자의 명복을 기원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상원사 목조제석천상의 중수발원문에는 소현세자(1612-1645)와 민회빈 강씨(1611-1646)의 3녀 경숙군주, 4녀 경녕군주, 5녀 경순군주 등이 참여하고 있다. 소현세자의 딸들은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부인 민회빈 강씨가 딸들을 앞세워 남편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_ 548쪽

용문사는 세조와 관련된 왕실 원찰이고 봉원사는 영조의 장손인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1752)의 원당(願堂)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봉원사 명부전 존상의 1704년(숙종 30)과 1858년(철종 9)의 복장 납입법은 왕실 원찰 또는 원당의 불상 복장 납입법을 계승하였을 것이다. 봉원사 명부전 존상의 목제 후령통과 청초폭자는 조선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복장물과는 다르고, 왕실에서 발원한 옥수동 미타사 아미타삼존상의 복장 납입법과 유사한 면이 있다. _ 691쪽

건칠관세음보살상의 상호는 방형에 가까우며 눈썹과 눈 사이의 간격이 넓은 편이다. 보관에는 현대의 쇠못이 박혀 있어 근래에 수리된 흔적이 남아 있다. 보관 중앙에는 화불이 표현되어 있고, 화염문과 화문이 보관을 장식하였다. 왼손을 들어 설법인을 한 수인은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는 조선시대 삼존상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표현법이다. _ 776쪽

조선 초기부터 문수신앙과 함께 나한을 신앙했던 상원사는, 영산전을 새로 건립하고 1886년(고종 23)에 경상도 예천 운복사 영산전 존상을 옮겨 왔던 것이다. 이처럼 19세기에 왕실과 관계가 깊은 사찰에서는 존상을 새로 조성하지 않고, 폐사되었거나 사세가 기운 사찰 가운데 왕실과 인연 있던 곳의 존상을 이운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_ 795쪽

오대산 상원사 영산전의 총 21존상 밑면에 이중으로 부착된 중수발원문에는 1886년(고종 23, 光緖 12)과 1958년에 중수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886년 중수발원문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내탕고(內帑庫) 천금(千金)으로 단청과 불사를 했고, 음력 5월 15일에는 상원사 영산전에 존상을 봉안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즉, 1885년(고종 22)에 왕실에서 하사한 내탕고 천금은 상원사 영산전 단청과 불사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왕실 사유 재산인 내탕고의 재물이 1885년에 상원사에 하사된 것은 조선 초 세조에 의한 중창으로 형성된 왕실과의 관계가 19세기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_ 8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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