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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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 이중표 (역해)
  • 승인 2022.08.2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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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로 읽는 대승경전 2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저작·역자 이중표 (역해) 정가 28,000원
출간일 2022-08-23 분야 불교
책정보

ISBN9791192476391(1192476395)

쪽수400쪽

크기152 * 225 * 20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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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붓다의 원음이 담긴 『니까야』를 바탕으로
산스크리트 원전 『금강경』을 해석하다

붓다의 원음이 담긴 『니까야』를 바탕으로 산스크리트 원전 『금강경』을 해석하다. 『금강경』은 우리나라 불자들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많이 독송하는 불경(佛經)이지만 그만큼 어렵게 느끼는 경전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금강경』에 대한 해설서가 다종다양하게 출간된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많은 해설서 가운데에서도 그 원전을 찾아, 쉽게 풀이해 놓은 책은 그리 많지 않기도 하다.

이 책은 『금강경』이 설하는 언어의 세계와 보살의 길을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접점을 연구해온 한국불교계 석학 이중표 명예교수는 초기경전 『니까야』를 통해 대승경전 『금강경』의 핵심을 꿰뚫는다. 『금강경』의 탄생 배경, 『니까야』와의 연관성을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한문 원전의 꼼꼼한 해석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언어의 모순, 관념, 보살, 깨달음, 자비, 지혜를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다. 『금강경』을 왜곡과 오해 없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책이다.

 

저자소개 위로
이중표
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정년 후 동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위촉됐다. 호남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범한철학회 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불교 신행 단체인 ‘붓다나라’를 설립하여 포교와 교육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정선 디가 니까야』, 『정선 맛지마 니까야』, 『정선 쌍윳따 니까야』, 『붓다의 철학』,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불교란 무엇인가』,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근본불교』 외 여러 책이 있으며, 역서로 『붓다의 연기법과 인공지능』, 『불교와 양자역학』 등이 있다. 
목차 위로
ㆍ 머리말
ㆍ 『금강경(金剛經)』 해제

1장 금강경(金剛經)의 취지
1. 『금강경(金剛經)』이 설해진 인연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제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2. 보살(菩薩)의 서원(誓願)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3.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돈오돈수(頓悟頓修)

2장 보살(菩薩)의 길
1. 다툼이 없는 보살(菩薩)의 길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2. 중생(衆生)이 곧 여래(如來)다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3. 불교는 뗏목과 같다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3장 평상심(平常心)에 길[道]이 있다
1. 여래(如來)는 다만 깨달았을 뿐, 깨달아서 얻은 것은 없다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2. 정말 소중한 것은 모두 공짜다
제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3. 불교는 대평등(大平等)의 무쟁법문(無諍法門)이다
제9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4장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
1.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
제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제12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2. 3계(三界)는 중생의 마음이 만든 것이다
제13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3. 중도(中道)는 모든 투쟁을 종식시킨다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4. 『금강경』을 널리 펴면 모든 업장(業障)이 소멸한다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제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5장 지금, 여기에서 현재의 법을 통찰하는 행복한 삶
1. 여래(如來)는 ‘모두가 한 생명이며 평등한 진실’을 보았을 뿐이다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2. ‘지금, 여기’만 있을 뿐이다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제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제20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제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제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제25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제28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제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3. 세계는 원자(原子)들의 집합이 아니다
제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4. 모든 이론[見]을 버리는 것이 정견(正見)이다
제31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상세소개 위로
언어가 만든 거짓 관념을 부수고
지혜를 갖춰 보살의 길로 나아가라


『금강경』은 우리나라 불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불경(佛經)이지만 그 내용은 매우 난해하다. 어쩌면 이 난해함 때문에 『금강경』이 더 많은 관심을 받는지도 모른다. 숨겨진 보물을 찾듯 맹목적으로 『금강경』을 외우고 추종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착은 바람직하지 않다.
『금강경』은 왜 난해한가. 저자 이중표 명예교수(전남대)는 그 이유를, 『금강경』에 자주 나오는 “그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라고 부른다”라는 형태의 어법(語法)이 읽는 이들을 혼란하게 만들어서라고 말한다. 말속에서 모순을 느끼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점을 깊이 통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순된 언어가 따로 있고, 논리정연한 언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사실 언어에 사로잡혀 생겨난 번뇌이며, 분별심임을 꿰뚫어보라는 의미이다.
『금강경』은 우리에게 관념의 세계를 부수고, 지혜를 갖춰 중생을 이롭게 하라고 가르친다. 『금강경』이 말하는 지혜는 ‘언어로 만든 거짓 관념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분별하는 마음을 사라지게 한다. 분별없는 마음으로 자비를 실천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 분별심이 없으니 집착도 없다. 그래서 『금강경』은 말한다.

“보살은 스스로 보살이라는 마음조차 내지 않는다. 애초에 보살이라고 하는 어떤 법(法)도 없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생사(生死)라는 꿈에서
우리를 깨우는 자명종과 같다


수많은 대승 경전 가운데 가장 일찍 성립한 경전 형태를 ‘반야부(般若部)’라고 일컫는다. 반야부 경전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p?ramit?)을 핵심 주제로 설명한다. 반야바라밀의 의미는 ‘통찰하는 지혜로 저 언덕에 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통찰하는 지혜’가 반야(般若)이고, ‘저 언덕’은 열반(涅槃)을 말한다. 즉 반야를 통해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설하는 경전이 반야부 경전이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반야용선(般若龍船)이다. 반야는 괴로운 이 언덕[生死]에서 행복한 저 언덕[涅槃]으로 건네주는 배와 같다.
『금강경』은 방대한 반야부 경전 중에서 비교적 내용이 짧은 편에 속한다. 짧은 내용 속에 방대한 반야 사상을 응축해 담다 보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이 책은 『금강경』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모두 함께 깨우쳐서 일체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삶의 추구이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부른다. 둘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여도 구제받은 중생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즉 무아(無我)임을 통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연기(緣起)하고 있을 뿐, 시공간 속에서 윤회하는 자아는 없다. 애초부터 태어나서 늙어 죽는 존재는 없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무아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無明)이고, 이러한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중생이다. 그래서 중생들은 생사윤회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사는 중생들이 자아라는 망상을 고집할 때 나타나는 착각이다. 따라서 이 집착을 버리면 생사윤회는 사라진다.
보살이 중생을 생사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제도한다고 하지만, 본래 생사가 없기 때문에 제도할 중생도 없다. 그러나 중생들은 본래 자신이 생사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아의 망상에 사로잡혀서 꿈꾸듯이 생사의 고통을 받고 있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실제로 제도할 중생이 있어서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제도할 것이 없는 중생을 꿈에서 깨어나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지만 실제로 구제받은 중생은 있을 수 없다. 『금강경』은 생사라는 물거품 같은 꿈에서 우리를 깨우는 자명종과 같다.

‘정말 소중한 것은 모두 공짜인데 우리는 왜 아귀처럼 다투며 사는가!’
다툼 없는 삶의 길이 『금강경』에 담겨 있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나무 열매도 산나물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도
눈부신 태양도 샘물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은 다 공짜다.

이 책에서 인용한 시인 박노해의 ‘천연설탕 아렌’이라는 시(175쪽)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시의 내용처럼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공짜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얻기 위해 서로 다투며 힘들고 지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본래 너와 나의 구별 없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은 공짜다. 누구나 빈손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공짜로 누리고 세상을 떠난다. 내가 평생을 일해서 만든 것도 죽을 때는 다 버려야 한다. 공짜로 주기 싫어도 주지 않을 수 없다. 실로 모든 것이 공짜다.
저자는 공짜로 사는 인생은 복 받은 인생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복 받은 인생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는 괴로움에 사로잡혀 산다. 너와 나, 너의 것과 나의 것이라는 분별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아를 깨달은 사람은 나와 남을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니 다툼이 있을 리 없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무쟁(無諍)이다.
너와 나의 분별없이 공짜로 주는 보시가 참된 공덕인 것처럼, ‘나’라는 집착 없는 보살행은 논쟁과 투쟁을 종식하고,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이룬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가르치는 보살의 길이며, 무쟁의 길이다.
책속으로 위로
붓다가 깨달아 가르친 불교의 진리는 4성제(四聖諦)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교를 통해서 깨달아야 할 진리도 4성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보다 더 현묘한 진리를 깨달으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금강경』을 통해서 이러한 환상을 버리고 진실한 깨달음을 구할 수 있도록 먼저 산스크리트 원전을 번역하고, 이를 근본불경인 『니까야(Nik?ya)』와 대조하여 해석했다. 그리고 이렇게 『니까야』를 통해서 『금강경』을 해석하면 난해한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 본문 5쪽

이 경의 이름을 ‘Vajracchedik?’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대부분 ‘Vajra’를 ‘금강’으로 번역한 구마라집의 번역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부수어버리는 가장 단단한 ‘금강석(金剛石)’으로 이해한다. 혹자는 제석천의 ‘금강저’나 ‘벼락’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Vajra’는 ‘금강석’이나 ‘제석천의 금강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금강역사(金剛力士)의 금강저’를 의미한다.
- 본문 17~18쪽

대승 경전 가운데서 반야부(般若部)는 가장 일찍 성립된 경전인데, 『금강경』은 반야부에 속하는 초기 대승 경전이다. 『금강경』에는 대승(大乘, Mah?y?na)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금강경』이 대승불교가 아비달마불교를 소승(小乘, H?nay?na)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을 대승이라고 부르기 이전에 성립된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금강경』은 반야부 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시기에 성립된 경임을 알 수 있다.
- 본문 23쪽

사찰이 부유해지자 승려들의 걸식 수행은 형식적인 것이 되었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승려들은 승원에 머물며 불교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논쟁을 일삼았다. 이것이 소위 아비달마불교이다. 이러한 논쟁의 결과 불교는 18~20여 개의 부파로 분열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불교를 부파불교라고 부른다. 대승불교 운동은 이러한 부파불교에 대한 반성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금강경』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 본문 36~37쪽

인도에서 『금강경』은 불교계가 분열을 일으키는 논쟁을 그치고 합심하여 보살의 길로 함께 나아갈 것을 촉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보살승으로 함께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금강경』의 취지였다.
- 본문 40쪽

『금강경』 4구게(四句偈)로 알려진 「여리실견분」의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則見如來)’는 중생과 여래는 차별이 없다는 의미와 함께 일체중생은 불성이 있다, 즉 “여래의 특성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若見諸相非相), 자신이 곧 여래임을 알 수 있다(則見如來)”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망상만 피우지 않으면 ‘중생이 곧 부처다’라는 말씀이다.
- 본문 122쪽

불교는 초월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을 추종하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은 초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아니라, 우리에게 다투지 않고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을 알려주신 안내자이다.
- 본문 209~210쪽

그런데 왜 많은 중생들을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고서도 열반에 들어간 중생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금강경』은 이 물음에 대한 해명이다.
- 본문 324쪽

부처님도 목탁을 목탁이라고 부르고, 우리도 목탁을 목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부처님은 목탁이 본래부터 목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목탁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목탁이 본래부터 목탁인 줄 알고 목탁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은 목탁의 진실, 즉 목탁이 바로 그런 것임[眞如]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 본문 325쪽

우리는 꿈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관념으로 세계를 보고 있다. 이 꿈에서 깨어나도록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교를 드러내 보여준다고 하는 것은 불교라는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 본문 3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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