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나라 존망의 보루 산성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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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든 스님] 나라 존망의 보루 산성山城
  • 유동영
  • 승인 2022.03.2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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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 그 안의 중심, 승군
금성산성 보국문

임진왜란 격전지이자 승군이 활약했던 산성 아홉 곳을 찾았다. 동래성과 진주성을 산성으로 부르지는 않으나, 동래성 안에는 마안산 그리고 진주성 안에는 월영산이 있어서 형세는 산성과 같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준비한 회령진성 또한 동쪽에 절벽을 둔 나지막한 산을 둘러서 쌓은 해안 성곽이다. 이렇듯 입지 조건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각각의 성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승군, 즉 스님들이다. 스님들이 첫 참전을 한 동래성 전투 등은 역사적 기록으로 전해오고, 진주성·금성산성·독산성 등에는 지금도 여전히 성안에 절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적 3만이 동래성을 에워쌌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모은 병사는 약 3,400명이었다. 그중에는 범어사와 국청사의 의승수군 100여 명도 있었다. 왜적은 남문 성밖에 팻말을 세웠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송상현이 답을 보냈다.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왜적의 총은 화살보다 빨랐고, 무수한 칼과 창은 줄지 않았다.

 

먼저 동문이 뚫렸다. 수없는 주검들을 짓밟으며 다가서는 왜적의 칼이 송상현을 향하고 있었다. “고립된 성을 적들이 에워싸니, 아군의 구원이 끊겼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중하여, 자식으로서 부모의 은혜를 가벼이 하고 맙니다.” 그가 죽기 전 사용하던 부채에 적어 아버지에게 남긴 시다. 이 전투로 조선군과 백성 5,000여 명이 전사했고, 왜적은 500여 명의 사상자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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