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울진 불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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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울진 불영사
  • 노승대
  • 승인 2022.02.0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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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의 대표사찰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불영사다. 1370년에 유백유가 지은 「천축산불영사시창기」에 의상 대사가 651년에 창건한 것으로 나온다. 독룡을 쫓아내고 용지(龍池)를 메운 후 절을 창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메우고 남은 연못에 부처님 그림자가 비쳤다 해서 불영사(佛影寺)라 했다고 한다.

의상 대사는 661년에 당나라로 유학했고 670년에 귀국했는데 676년 다시 이곳을 지날 때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 돌아오셨구나” 하면서 기뻐했다. 이로 인해 부처님이 돌아오신 곳이라 하여 불귀사(佛歸寺)라고도 했다고 한다. 의상 대사를 존숭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설화다. 조선 초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불귀사라 했으니 이후 어느 때에 다시 불영사로 돌아갔을 것이다.

불영사는 입지 조건이 매우 특이한 곳에 있다. 불영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빼어난 계곡미에 취해 걷다 보면 피곤한 기색을 느낄 새도 없이 완만한 길은 깊은 숲길로 들어선다. 참나무, 소나무 등 해묵은 나무들 사이로 얼마 가지 않아 얕은 오르막에 올라서면 느닷없이 너른 대지가 나타난다. 신기하다. 깊은 산속으로 오래 들어온 것도 아니고 계곡을 한참 벗어난 것도 아닌데 감추어진 듯 이런 풍경이 있다니!

기기묘묘한 바위 봉우리들은 높이 솟아 사찰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고 용이 살았다는 연못이 보이는가 싶더니 고찰의 향기가 묻어나는 건물들이 정남향으로 겹겹이 늘어섰다. 이곳은 세파의 시끄러움도 끊어졌고 계곡의 우렁찼던 물소리도 가라앉았다. 계곡 건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경이 이렇게 고즈넉이 들어앉아 얼마나 오랫동안 역사의 숨결을 쌓아 왔을까?

비경 속에 있는 비상한 사찰이었는지 신이한 일도 많았다. 인현왕후와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숙종의 정비였던 인현왕후는 1689년 장희빈에게 밀려 폐서인이 됐다. 5년 뒤인 1694년 인현왕후 민씨는 안국동 감고당에 머물고 있었다. 자식도 없고 다시 불러줄 임금도 아니니 차라리 죽으리라 마음먹고 살며시 잠이 들었다. 꿈속에 어느 스님이 나타나 “마마의 나쁜 운수는 곧 끝이 나옵니다. 부디 옥체를 귀히 여기소서. 하루만 참으시면 기다리시던 소식이 올 겁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누구냐”고 물으니 마지못해 “불영사에서 왔다”라고만 했다. 하루 뒤 기적적으로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왕후에 올랐던 장옥정은 다시 장희빈이 됐다.

왕후는 불영사 사방 십리의 산과 전답을 시주했고 1868년 4월 승려 유찰이 ‘불영사 인현왕후 원당 상량문’을 썼다. 그 원당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고 상량문도 전해지고 있다.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부르는 불영계곡은 1979년 12월에 명승 제6호로 지정됐다. 구룡교를 건너 걸어가면 맑은 계곡 건너편으로 삼각봉이 보인다.

 

왼쪽 바위 벼랑에는 단하동천(丹霞洞天) 각자가 있다. 붉은 노을이 걸린,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빼어나 신선들이 살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지상낙원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미륵존불 각자가 있다. 부처님의 세계에 곧 들어서니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입도 조심하라는 뜻이다. 평소에도 지킬 행동지침이다.

 

차도를 벗어나 명상의 길로 들어서면 앉아서 입적한 양성 혜능 스님(1621~1696)의 승탑이 있다. 인현왕후 꿈에 현몽한 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얕은 언덕에 올라서면 다시 길 오른쪽에 소화 10년(1935)에 새긴 ‘남무아미타불’ 한글 각자가 있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염불하며 들어가란 뜻이다.

 

북쪽으로 바위산 능선을 배경으로 많은 건물이 좌우로 벌려 섰다. 부처님 그림자가 비치었다는 불영지(佛影池) 연못 뒤로 종각과 대웅보전이 보인다.

 

1933년에 세운 불영사 사적비다. 비문은 한국전쟁 때 오대산 상원사에서 법당에 들어앉아 절을 불태우러 온 국군에게 불을 놓으라던 한암 스님이 지었다.

 

그 그림자가 연못에 떨어졌다는 부처님 바위. 김창흡이 이 절경을 “연꽃 일천 송이 성처럼 에워싸고 금탑봉 청라봉이 날아갈 듯 솟았다”고 노래했다.

 

보물인 불영사 대웅보전. 임진왜란 후 중건했으나 1720년 화재로 다시 소실, 1725년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했다.

 

조선시대에만 3번의 큰 화재로 소실되면서 화재방지를 위해 축대 아래에 수신인 거북 두 마리를 안치했다. 삼신산도 바닷속에서 신령한 거북이 지고 있다.

 

전에는 자갈에 묻혀 있어 머리와 등만 보였는데 노출된 모습을 보니 두 발도 다 새겨 놓았다. 조각은 섬세하지 않지만 마치 앞으로 기어가는 듯하다.

 

대웅보전 서쪽 대들보에는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용가(龍架)가 설치돼 있다. 이런 용가는 상여에도 설치된 것이 있다. 요령은 영가를 극락으로 인도한다.

 

법당 안 우물천장 연꽃문양 중심에는 반원형으로 깎은 나무를 일일이 부착했다. 연꽃을 입체적으로 보이기 위해 승려 장인들이 온갖 정성을 다한 것이다.

 

축대 밑의 거북돌에는 몸통이 보이지 않는다. 그 몸통이 대들보에 각각 하나씩 붙어 있다. 두 마리가 다 머리가 없어 그런 이야기가 생긴 것일까?

 

대웅보전 내부 충량에 용조각이 없는 대신 삼존불 양쪽 기둥 위 목재에 기이한 형상의 용머리를 각각 조각했다. 보이는 영산탱화는 보물로 지정됐다.

 

지금은 의상 대사를 모시는 의상전이지만 원래는 인현왕후의 원당이었다. 원당(願堂)은 왕실의 복을 빌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1867년에 지었다.

 

응진전은 나한전, 영산전이라고도 부른다. 태조 5년(1396) 화재에도 홀로 남았고 임진왜란에도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보물)이다..

 

현판 옆에는 임진왜란 후에 나타나는 용조각이 없다. 대신 추녀 아래에 어설픈 용조각을 설치했다. 턱 아래로는 두 손을 내밀고 여의주를 꼭 쥐고 있다.

 

응진전은 맞배지붕이지만 사방에 모두 공포를 설치했다. 앞뒤도 아니고 옆면에도 공포를 설치한 건물은 보기 힘들다. 공포도 거의 수직으로 잘린 고식이다.

 

극락전 현판은 해사 김성근(1835~1919)이 썼다. 그는 전라감사였을 때 전생이 해봉(海奉)이라는 승려였음을 알고 호를 해사(海士)라고 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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