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세계의 변호인, 지장] 한국형 지장신앙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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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세계의 변호인, 지장] 한국형 지장신앙의 변화
  • 이경란
  • 승인 2022.01.2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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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나한·시왕 한데 어우르며 저승 구원하다
통도사 극락보전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 벽화.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중생을 극락세계로 데려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는 배를 말한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연기(緣起)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불교 교리는 인과설, 윤회설 등의 업(業, karma)설에 기인한다.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한 이래 다양한 불교사상이 전해지고 취사되며 약 1,700여 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그 사이 한국 불자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신앙은 단연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이다. 관음은 현세의 구복을, 지장은 내세를 구원해주는 신앙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을 다루는 지장신앙은 한국 사찰 대부분에서 만날 수 있는 명부전(冥府殿)을 통해 그 상황을 알 수 있다. 명부전은 현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의 세계와 관련 있다. 명부전의 주존(主尊)은 지장보살이고, 그의 역할은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의 모든 중생을 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장보살은 지옥을 중심으로 한 저승세계를 구원하는 인물로 인식됐다. 이는 시대에 따라 정토·나한·시왕신앙과의 결합에 따른 결과다.

 

삼국시대, 지장신앙의 도입

지장신앙은 삼국시대 처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흠명 6년(欽明, 545)에 장육(丈六) 불상을 보냈고, 민달 6년(敏達, 577)에 지장상을 전했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처음 지장신앙이 나타나는 시기는 신라 진평왕 대(579~632) 원광 법사에 의해서다. 그가 지장 신앙자였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나타나지 않으나 ‘점찰보’를 경영했다는 기록으로 ‘점찰법회’를 주최했음을 알 수 있다. 점찰법회는 『점찰경』을 근거로 하는 법회다. 점찰(占察)은 선·악이 쓰인 나무 막대를 던져서 나온 결과에 따라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수행하는 점이라고 해서 단순히 길흉을 따지는 점술과는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점찰경』의 설주(說主)가 지장보살이며, 참회와 지장보살 경배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점찰법회는 이렇게 쉬운 방법으로 진평왕 대 지혜 비구니에 의해 대중화되고 매년 열리는 의례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원효 대사에 이르러 지장신앙은 정토신앙과 만나면서 점찰법회에서 죽은 사람을 위한 추선(追善)이라는 의미가 더해진다. 

지장신앙이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몸에 극단적인 고통을 가해 이를 이겨내는 참법을 행한 진표 율사에 의해서다. 진표가 활동한 시기에 지장신앙의 핵심경전인 『지장경』을 비롯한 지장삼부경이 모두 소개돼, 독립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는 기초가 마련됐다. 점찰법회는 내생의 복을 구하는 법회로 인식돼 김대성이 지었다는 석굴암 본존 뒤편의 감실(龕室, 불상 등을 봉안하기 위한 곳)에 다른 보살상과 함께 지장보살상이 모셔지게 됐다. 이는 8세기 밀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지장화상법’이 소개되고, 왕실은 물론 백성들을 위한 진표의 서민적인 전법활동이라는 밑거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오대산에서는 『십륜경』에 근거해 남방에 해당하는 붉은색으로 지장방(地藏房)을 뒀다. 이와 함께 지장보살을 예배하며 『지장경』을 암송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는 관음이나 미륵신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유행한 신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도사 용화전 포벽 <지장보살도>, 조선 후기, 노재학 제공 

 

지장보살, 시왕을 거느리다

『시왕경』이 유입된 고려시대로 들어서면, 지장신앙은 왕실 주도의 치병(治病) 의식으로 변한 점찰법회가 고려 중기까지 거행됐다. 점찰법회가 사라진 대신 도교 색채가 짙은 시왕신앙과의 결합으로 지장보살은 지옥의 명부세계에서 시왕을 거느린 주존으로 위상이 변한다. 이에 대세지보살을 대신해 지장보살은 관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로써 고려불화에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말 무신의난과 잦은 외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람들은 사회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현생에서의 구복을 상징하는 관음보살과 내생에서의 구원을 상징하는 지장보살에게 희망을 투영했다.  

또한, 고려시대 등장한 두건지장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두건은 중국 돈황 지역에서는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시작됐으나, 고려에서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던 승려들의 복식과 승려에 대한 존숭과 관계가 깊다. 승려에 대한 우대정책은 나한신앙과 연결돼 수많은 의례 중 나한재(羅漢齋)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으며, 다수의 나한상 제작으로 이어졌다. 나한상과 지장보살의 비슷한 형상은 나한신앙의 유행을 불러왔다. 모래가 운다는 명사산에서의 모래바람을 피해 천을 덮어쓴 수행자의 모습은 서역과의 교역으로 고려에 전해지면서 모진 고난 속에서 수행하는 승려, 즉 나한과 지옥에서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중생구제에 힘쓰는 지장보살의 형상이 겹쳐져 두건지장보살로 탄생한 것이다.

 

심원사 석조 지장보살좌상. 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상주하고,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면, 원심원사가 위치한 보개산은 지장보살의 상주처다. 지장보살의 왼쪽 팔 위에 화살을 맞은 상흔이 있다. 지장보살은 누군가에 의해 전쟁 이전 극적으로 석대암에서 옮겨져 휴전 이후 현재의 심원사에 모셔졌다.

지장보살 성지의 영험기

고려시대 지장신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영험기를 들 수 있다. 중국과 일본에 다양하게 전해지는 지장보살영험기에 비하면 다소 적다고 할 수 있지만, 이때부터 지장보살영험에 대한 설화들이 등장한다. 평창 오대산 남대지장암, 고창 도솔산 선운사와 함께 지장보살 3대 성지로 알려진 철원 보개산 심원사와 관련한 여러 사료에는 다음과 같은 지장보살의 영험한 이야기가 전한다.

“석대암은 철원 보개산 심원사에 딸린 암자인데. 석대암 기슭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 까마귀가 배나무에 앉아 울고 있었다. 나무 밑에는 독사 한 마리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까마귀가 날아가는 바람에 배가 독사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독사는 화가 나 사력을 다해 독을 뿜었다. 까마귀는 그 독을 맞아 죽었고, 독사도 힘이 빠져 숨을 거뒀다. 까마귀와 뱀은 죽어서도 원한을 풀지 않고, 뱀은 멧돼지로 까마귀는 암꿩으로 환생했다. 어느 날 멧돼지가 먹이를 찾다가 암꿩을 보고는 큰 돌을 굴려 암꿩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마침 한 사냥꾼이 지나다가 죽은 꿩을 발견하고는 집으로 가져가 먹었다. 이후 사냥꾼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까마귀와 꿩의 업보를 갖고 태어난 아들은 자라 훌륭한 사냥꾼이 되어 멧돼지를 사냥하러 다녔다. 어느 날 보개산으로 사냥 간 아들은 금빛 찬란한 돼지를 발견했다. 사냥꾼은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멧돼지는 피를 흘리며 달아났다. 그들이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대소라치(환희봉)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핏자국이 멈춘 곳에 돼지는 보이지 않고 샘이 있었는데, 그 안에 머리만 내놓은 지장상이 있었다. 

석상을 자세히 보니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혀있었다. 사냥꾼은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꿈쩍하지 않았다. 다음날 샘을 다시 찾았는데 그 석상이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이를 본 사냥꾼은 참회하며 여러 명과 함께 암자를 짓고 돌을 모아 대를 쌓아 석대라 이름하였다.”

금돼지는 살생을 막기 위해 화현한 지장보살이었으며 지금도 철원 심원사의 지장상에는 화살 자국이 남아있다. 이후로도 지장보살영험기는 보개산을 중심으로 여러 이야기가 회자했다. 

 

석대암 스님에 의하면, 이곳 석대암에서 광복 3일 전에 8·15해방과 남북분단을 예견하는 두 줄기 빛이 하늘을 향해 방광했다고 한다. 분단의 진원지는 곧 통일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통일을 알리는 빛줄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칠 그 날을 위해 스님은 지장기도를 이어갈 것이라고…. 지장보살의 가피로 순석 형제가 불가에 귀의했으니 이곳이야말로 생지장도량이라고 했다.
심원사와 보개산
원심원사에서 석대암까지는 약 2km의 포장 임도다. 멀지는 않으나 눈이 쌓인 날에는 차편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 석대암 뒤로 보이는 봉우리는 지장봉 또는 환희봉이라 불리는 보개산 최고봉이다. 지장봉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철원 쪽에서는 주로 지장산이라 부른다. 암자의 지장전은 아직 H빔이 박힌 가건물이나 그 옆의 영하 20℃에서도 얼지 않는 지장샘물은 창건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심원사 명주전의 지장벽화

또 한 예로, 선운사 도솔암으로 오르는 입구의 마애불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한다. 구한 말 동학의 주도 세력들이 미륵 출현을 내세워 이 비기를 꺼내 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곳은 ‘도솔천내원궁’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어 이곳이 미륵보살이 머무르는 공간임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도솔암 전각 안에는 지장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도솔암 입구의 마애불은 하생한 미륵부처를 상징하고, 미륵보살이 올 때까지 이 세상을 책임지는 이는 지장보살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험담과 사람들의 바람은 지장보살을 상류계층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두루 믿는 신앙이 되게 했다.

지장신앙은 죽음 이후를 설명하고 내세를 희망하는 중요한 불교신앙이 됐고, 조선시대 내내 지속적인 폐불정책 속에서도 오히려 왕실에서부터 민중에게까지 깊이 퍼지게 됐다. 그러나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유행은 지장보살의 형상을 남성형으로 고정화했다. 또한 지장전보다는 다수의 명부전이라는 편액으로 알 수 있듯이, 지장보살의 활동무대가 육도가 아닌 지옥으로 한정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에 모셔진 지장보살좌상(보물)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대중화와 한계

조선시대는 겉으로는 유교정책을 표방했지만, 왕실과 양반 부인, 백성들은 여전히 불교를 믿고 의지했다. 특히 조선 전기 세조와 문정왕후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많은 수의 『지장경』을 간행했다. 게다가 훈민정음 창제 후 다수의 불경이 언해됐는데, 『지장경』이 중요한 간행목록에 들어있었다. 왜냐하면 『지장경』의 중요 내용이 효(孝)를 다뤘으므로,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사상과 통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많은 승려가 전쟁에 참여했다. 또 전쟁으로 죽은 많은 이들의 사후 처리를 불교 교단이 유교를 대신해서 했다. 이에 민심은 예와 형식에만 치중한 성리학을 점점 떠나게 됐고, 불교는 지장신앙을 중심으로 민중불교로 거듭났다. 거기에 다음 생을 위한 49재의식이 불교를 천시한 양반들 사이에서도 유행하게 된다. 조선 중기와 후기에 많이 나타나는 ‘삼장보살도’와 ‘감로도’는 이러한 지장신앙의 유행을 잘 보여준다. 

조선에서 지장신앙이 번창하게 된 데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효를 실천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양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지장신앙은 죽음 이후를 설명하고 내세를 희망하는 중요한 불교신앙이 됐고, 조선시대 내내 지속적인 폐불정책 속에서도 오히려 왕실에서부터 민중에게까지 깊이 퍼지게 됐다. 그러나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유행은 지장보살의 형상을 남성형으로 고정화했다. 또한 지장전보다는 다수의 명부전이라는 편액으로 알 수 있듯이, 지장보살의 활동무대가 육도가 아닌 지옥으로 한정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원래 지장보살은 성문(聲聞)의 형상, 즉 비구의 모습과 한 손에 여의보주와 다른 한 손에 6개의 고리가 달린 육환장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출가한 수행자를 일컫는 성문이 성별을 구별하는 명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조각상에서 수염을 표시함으로써 지장보살을 남성의 성문으로 나타냈다. 이는 동아시아의 유교문화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적인 관점이 반영돼 정형화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地’는 만물을 생장시키고 받아 주기 때문에 ‘대지’라고 한다. 그러한 ‘地’의 바탕에서 모든 중생을 품어주는 존재가 지장보살이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천사를 보여준 지장신앙은 각 사회가 요구하는 사상과 방법에 따라 변화했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비록 원형을 잃기는 했지만, 한국불교사에 최초로 등장한 불교신행은 점찰법회라는 지장신행이다. 동시에 죽음이라는 문제가 있는 한 앞으로도 그 형식과 내용이 변화해가는 동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유동영

 

이경란
부경대 사학과 강사. 부경대에서 「한국 지장신앙의 변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저로 「점찰수행을 통해 본 신라 초기 지장신앙 양상」, 「지장신행자로서의 진표율사 고찰」, 「감로탱에 나타난 양반의 지장신앙 양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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