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습니다] 불탄 사진첩, 과거와 대화하기
상태바
[농사를 짓습니다] 불탄 사진첩, 과거와 대화하기
  • 윤남진
  • 승인 2022.02.14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남지역 산골짜기로 이사해 정착한 지 4년이 됐다. 산기슭에 남향으로 살림채가 있고, 앞으로는 마당을 가로질러 계곡이 흐른다. 살림채 위쪽으로 ‘대원정사’라는 현판을 단 법당이, 좀 떨어진 언덕 위엔 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작은 수행도량을 겸하고 있는 살림집이라고 보면 된다. 

이곳은 처갓집이다. 충청도가 고향이지만 서울에서 더 멀고 낯선 처갓집으로 낙향한 이유는, 부모님이 연로해 더 쇠하기 전에 모셔야 한다는 아내의 뜻 때문이었다. 

낯설고 불편한 타향살이에 그럭저럭 익숙해지던 어느 날, 장인어른과 아내가 창고 정리를 시작했다. 창고는 다용도 공간이다. 안쪽으로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농에 들여놓지 못한 옷가지가 있었다. 거실로 쓰는 공간에는 장인어른이 소장하고 있는 책과 갖가지 작품, 소품이 있었다. 한 이틀에 걸쳐 짐을 대강 정리하고 방에 있던 짐 중에서 당장 소용치 않는 것은 창고로 옮겼다. 청소까지 마치고 손을 털었다. 

문제는 다음 날 일어났다.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찾아 도량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불이야!” 하는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달려가 보니 불길은 하우스 창고 한 가운데쯤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이 산으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하던 찰나, 바람이 불어 산으로 향하는 언덕에 불길이 붙어버렸다. 황급히 초롱에 물을 떠 언덕에 올라가 뿌렸다. 다행히 풀이 자라나 있고 마른 검불들이 무성하지 않아 불길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내가 먼저 소방서에 신고했는지 소방차가 오고 뒤따라 의용소방대원들까지 동원됐다. 다행스럽게도 소방차가 물을 뿌리자 바로 불길이 잡히고 진화됐다.

불에 탄 것 중에는 채 풀지도 않고 내버려 뒀던 여러 장의 사진 액자들, 그중에서도 영정사진으로 썼던 부모님의 생전 모습, 어머님 생신에 3대가 모두 모여 찍은 가족사진이 있었다. 그동안 집안 잔치나 제사 때에 배경으로 늘 함께 서 있던, 『금강경』을 한글로 쓴 10폭 병풍도 완전히 불탔다. 덩달아 창고 바로 옆, 낙향한 첫 작품으로 목조로 지은 ‘생태 뒷간’에 불이 옮겨붙어 전소됐다. 남은 것이라곤 타다가 물에 젖어 쓰레기 신세가 된 책뿐이었다.

 

과거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용기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