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우리에게 첫눈처럼 찾아올 그것
상태바
깨어있는 우리에게 첫눈처럼 찾아올 그것
  • 권순범
  • 승인 2022.01.06 1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브라이언 피어스 지음 | 박문성 옮김 | 22,000원
브라이언 피어스 지음 | 박문성 옮김 | 22,000원

나와 가까운 사람들 중에 훌륭한 기독교인이 한 분 있다. 이분은 매우 독실한 신자이긴 한데 좀 진보적인 신학관을 갖고 있다. 이분에 따르면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지옥은 없다. 그건 그저 사람들이 나쁜 짓하고 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가정이 있어야 신앙도 있다고 믿는 이분은 신앙생활에 몰두한 나머지 가정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한다. 이분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인 나에게도 교회 나와서 구원받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분은 ‘길 잃은 어린 양’인 내가 불교계의 말석을 전전하는 것을 내버려 둘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어린 양이 불교계에서 성공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언젠가 이분이 본인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다음의 일이었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이분은 졸지에 여러 명의 어린 자식들과 치매 기미가 있던 시아버지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수중에 가진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공단에서 일했고, 퇴근 후에는 동네 가게에서 일했다. ‘투잡’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면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럭저럭 일을 마무리하고 잠깐 눈을 붙이면 다시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아이들의 도시락 여러 개를 다 싸놓고, 깨끗이 빤 교복들도 칼같이 다려놓은 다음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출근길의 통근버스 차창에는 뿌연 김이 서려 있었다. 새벽 어둠을 배경으로 삭막한 공단의 불빛이 아롱아롱 보였다. 막막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혼자서 나직이 찬송가를 부르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사람들은 그분이 신앙의 힘으로 그 세월을 이겨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분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 내가 보기에는 부와 명예는 고사하고 온갖 고통만 쏙쏙 골라서 안겨 준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에 의해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 하느님은 누구일까? 힘든 일, 고단한 몸, 비어가는 쌀독, 빚 돌려막기와 오랫동안 혼자 사투를 벌이면서도 끝내 자식들을 무사히 키워낼 힘을 주었다는 그 하느님은 누구일까? 

이 책 『깨어있음』을 처음 맡게 되었을 때, 나는 불교의 마음챙김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으로 이어지는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신부님이 쓴 책이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하느님에 대한 신선한 설명들이 눈길을 확 끌었다. 독특하면서도 의미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그분의 하느님에 대한 나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는 것도 도와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깊은 밤이 되도록 혼자 사무실에 남아 이 책의 원고를 보고 있었다. 문득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걸린 시신은 종교적 예술작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죽은 아들이었다. 갓난아기였을 때 영양실조로 죽어 간 그들의 아이들이었다. 치료약도 희망도 없이 암으로 죽어 간 그들의 이웃이었다. 채찍질 당하여 피범벅인 예수의 시신은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그들의 조국이었다.”(387쪽) 성스러운 대상에 날것 그대로의 고통을 투사하는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음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나왔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고통받고 하느님은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 한다. ......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하는 길을 선택하고 걷는 하느님만이 남는다. 그렇게 하지 않는 신은 거짓 신이다.” 원고의 다른 부분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챙김과 깨어있음과 ‘지금 이 순간’과 고통과 사랑이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빛을 발했다. 

틱낫한 스님에 따르면 사랑은 고통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본인에게 닥쳐올 고통을 피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한 인물이다. 성 오스카 로메로 주교 역시 말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은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하나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통해 우리는 이 삶을 구성하는 모든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혹은 ‘지금 이 순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고통 속에서 절대적인 차원과의 일치를 경험할 수 있다. 작은 ‘나’를 초월한 그러한 일치 속에서 평정심을 가지고 꿋꿋하게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구원을 경험한다. 

그 깊은 밤의 사무실에서 비로소 나는 그분의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분은 힘들었던 지난 세월이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로웠던 날들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분의 말은 그저 ‘정신승리’가 아닐 것이다. 그분은 족쇄 같은 자신의 처지를 온전히 보듬어 안고 밑바닥 없는 삶의 고통을 돌파했다. 천국을 바라고 지옥을 두려워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살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지금 이 순간’에 실천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그분은 그 순간들을 통해서 자신의 고달픈 삶이 유구한 의미로 성화(聖化)되는 것을 경험했던 것 같다. 그분의 하느님은 먼 미래의 어느 날에 우리를 심판할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복음 28장 20절)라고 약속하는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길로서 항상 그분과 함께 있었고, 그분은 그 길로 인도됨으로써 자신이 살았던 신산한 세월을 “감사하고 은혜로웠던 날들”로 기억하게 되었다.

나는 자정을 훨씬 넘기고 나서야 사무실을 나섰다.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전까지 원고를 읽으면서 느꼈던 깨달음의 감동은 신기루 같이 사라졌다. 나는 깊이 잠든 종로 거리를 걸었다. 인사불성이 된 취객 한 명이 욕설과 함께 삿대질을 하며 지나갔다. 부스스한 내 머리카락이 겨울바람에 날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평소의 온갖 번뇌가 머리속에서 아우성을 쳤다. 나는 피식 웃었다. 내게도 구원이란 것이 있을까? 

원고에서 읽었던 엠마오로 가는 길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난 후 예수의 두 제자는 공포와 슬픔에 사로잡혀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부활한 예수가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스승을 알아보지 못한 두 제자는 그 ‘나그네’에게 이미 어두워졌으니 자신들과 함께 그 밤을 지내자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청을 받아들인 예수는 그들과 같이 어느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한다.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예수를 본 제자들은 비로소 “눈이 열려” 그가 부활했음을 깨닫게 된다. 나중에 제자들은 이야기한다.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복음 24장 32절) 

나에게도 나만의 엠마오로 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 따르면 그 길은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 끝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마음이 타오르”면서 공포와 슬픔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나도 나의 엠마오로 가는 길을 걷는다면 마침내 구원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어두운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눈이 오기를 바랐다. 어디선가 구원이 내게 뭔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것은 언젠가 얼핏 들었던 노래 제목이었지만 그 순간 내게는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다.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