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지리산 선비 남명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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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지리산 선비 남명 조식
  • 노승대
  • 승인 2021.12.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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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있었다. 경상도 선비 고을로는 한양에서 남쪽을 향해 봤을 때 왼쪽에는 안동이요, 오른쪽은 함양이라는 말이다. 안동에 버금갈 만큼 함양도 선비 고장으로 명성을 떨쳤다는 뜻이다. 그 첫머리에 오르는 선비는 김종직의 제자 정여창으로 함양 개평마을이 고향이고 조선 5현에 올랐기 때문이다.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 풍천 노씨, 초계 정씨가 터를 잡은 집성촌이다.

함양과 가까운 산청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살았다. 이퇴계와 동갑내기로 당시에는 쌍벽을 이룬 선비였다. 퇴계는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남명은 오로지 학문을 닦으며 제자들을 길렀다. ‘안을 밝히는 것을 경(敬)’이라 하고, ‘밖으로 결단하는 것을 의(義)’라고 하며 항상 앎과 실천을 강조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의 가르침대로 정인홍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모두 의병장으로 나섰다. 홍의장군 곽재우도 바로 남명의 제자다.

남명이 머물던 지리산 산천재로 가려면 남사마을을 지나게 된다. 100여 호의 한옥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높은 옛 담길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안동 하회처럼 양반마을로 밀양 박씨, 성주 이씨, 진양 하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바로 이곳 출신이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도 1597년 6월 1일 하루를 여기에서 유숙했다. 옛 담길이 집집으로 연결돼 있어 지금은 남사예담촌이라 부르고 있다.

 

300년 회화나무가 ‘X’자로 교차한 채 자라서 부부나무라고 부른다. 이 나무를 통과하면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고 한다. 이 나무를 심으면 학자가 정승이 난다고 하여 양반가에서 많이 심었다.

 

사양정사는 1920년에 지은 근대 한옥으로 큰 현판 글씨는 성당 김돈희(1871~1936)의 글씨다.

 

사양정사 뒤쪽의 은목서. 은색꽃이 피면 은목서라 하고 금색꽃이 피면 금목서라 한다. 향기가 독특하고 진한 데다 천 리를 간다고 해서 천리향이라고도 부른다.

 

사양정사 마당 동쪽의 오래 묵은 금목서. 초가을에서 초겨울까지 나뭇잎 아래에 겸손한 듯 피지만 그 향기는 만 리를 간다고 해서 만리향으로도 부른다.

 

배롱나무도 수령이 130년이다. 여름 내내 꽃을 피우기에 백일홍나무라고 흔히 부른다. 정사 안채에도 수령 220년 단풍나무와 150년 매화가 있다.

 

남사마을 터줏대감 감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는다. 산청곶감의 원조로 모양이 납작한 반시가 지금도 열린다. 하연(1376~1453)이 심었다 한다.

 

고려 말 하연의 조부인 원정공 하즙이 심은 매화는 수령이 700년인 홍매다. 단속사지 정당매, 남명의 산천재 앞의 남명매를 합해 산청삼매라 부른다.

 

남쪽지방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무화과 열매가 남사마을 어느 한옥 마당에서 익어간다. 강원도에도 사과밭이 널렸으니 아, 정말 기후가 많이 달라졌구나.

 

남명은 61세에 지리산 초입 덕산의 덕천강가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왼쪽의 매화가 바로 남명이 심었다는 남명매다.

 

현판 위의 벽화들은 정조가 내려준 제문에 그림의 내용들이 들어 있어 산천재 중수 때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소부·허유의 고사를 그린 벽화.

 

이윤은 밭을 갈며 지내다 왕의 부름을 받고 출사한 뒤 평생을 바른 임금을 만드는 데 헌신했다. 남명도 임금이나 조정에 대해 할 말은 하는 선비였다.

 

진시황의 가혹한 정치를 피해 상산으로 들어간 네 현인을 상산사호(商山四皓)라 한다. 이는 남명이 세속을 떠나 지리산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을 상징한다.

 

만고불변의 천왕봉은 하늘이 울어도 울지를 않네. 남명은 지리산을 닮고 싶어했다. 언제나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천왕봉처럼. 산천재에서 바라본 천왕봉.

 

남명이 죽은 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 그의 문인들이 세운 덕천서원. 대원군 때 철폐됐다가 1926년에 복원했다.

 

생전에 손수 잡은 남명선생의 묘는 산천재 뒷산에 51세에 얻은 송씨부인과 함께 아래위로 묻혀 있다. 3남 1녀를 두었고 후손이 번성했다.

 

거림계곡 초입의 오솔길. 거림계곡은 이름대로 큰 나무들이 들어찬 계곡이었으나 일제 때 벌채됐다. 골이 깊어 빨치산 이현상의 남부군 지휘소가 있었다.

 

청학동 삼성궁은 한풀 선사가 50여 년에 걸쳐 민족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쌓은 성전이다. 민족의 시조인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셨기에 삼성궁이라 이름했다.

 

몇십만 평 산록에 펼쳐진 기상천외의 삼신궁, 마고성, 건국전 등을 돌아보고 한풀 선사와 연락한 후 산장에서 만나 막걸리로 짧은 회포를 푼 후 헤어졌다.

 

지리산 단풍이라 하면 뱀사골과 피아골이 가장 유명하다. 남명 선생이 산이 붉고[山紅], 계곡이 붉고[水紅], 사람도 붉다[人紅]고 한 삼홍소가 압권이다.

 

최치원이 살았던 인연으로 고운동이라 부르는 지리산 동네의 굴피집.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집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바람에 날릴까 돌을 얹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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