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 사찰 밖 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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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 사찰 밖 산신
  • 윤열수
  • 승인 2021.11.2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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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령山神靈 어떻게 모셨을까?
보은 구병산 산신당 재현 모습.

불교와 습합한 산신신앙

우리 민족은 유난히 산이 많은 자연환경으로 인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자연스럽게 산을 숭상해 왔다. 산의 주인이자 산을 수호하는 신령인 산신은 산신령(山神靈), 산령(山靈), 산군(山君)으로 불리며 일찍부터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산신은 농경사회에서 풍년과 흉작을 좌우하는 믿음의 대상이었다. 유목민에게는 사냥감이 풍부하고 가축이 잘 자라도록 안배하며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대상이었다. 또한 자식을 점지해주고 사악한 악귀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며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산신신앙은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토착신앙으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 명확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용왕신, 조왕신과 같은 무속신앙이나 칠성신앙 같은 원시종교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민중의 숭배를 받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원시 토착신앙이 체계적·논리적·철학적 교리를 갖춘 불교에 언제, 어떠한 형태로 습합(習合, 여러 종교가 서로 절충해 혼합하는 현상)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쉽게 찾을 수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고려시대에 깊이 뿌리내린 불교가 크게 위축되는 종교적 혼란기를 거치게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거치면서 불교는 재부흥의 시기를 맞이하며, 유교나 도교는 물론 원시 토착신앙까지도 불교의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하게 된다. 전란 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무병장수와 부귀다남(富貴多男) 등 민중의 절대적인 희망이 자연스럽게 불교와 습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유불선의 습합과 함께 명산의 주인 격인 산신도 자연스럽게 포용했을 것이다.

고대로부터 삼국이 우리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다수 남아있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전습돼 도선 국사가 풍수지리설을 통해 왕건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는 등 고려 건국에 산신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 건국의 주인인 태조 이성계 역시 조선 팔도 명산의 산신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도움을 청했고, 꿈속에서 왕권의 상징인 금척(金尺)을 받아 건국에 성공하기도 한다. 

조선 태조 3년(1394) 이조의 상소에는 산천신과 성황신에 대한 명칭과 의식 제의에 관한 기록들이 보인다. 세종 19년(1437) 3월 제의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됐던 신패, 즉 위패에 대한 상소 기록에 따르면 ‘비백산신위판(鼻白山神位版)’을 ‘비백산지신(鼻白山之神)’으로, ‘지리산신위판(智異山神位版)’을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으로 고치도록 했다. 결국 전국 명산과 진산의 제의에서 사용했던 위패로 인해 파벌싸움까지 벌어졌다. 

여기서 산악신앙과 성황신앙 등이 호국신앙으로 변모되는 과정과 산신각이나 성황사, 성황당(서낭당) 내에는 목제신위판을 모시고 제의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찰 내 산신신앙과 사찰 밖 산신신앙의 형태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계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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