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난의 시대, 왕실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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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과 불교] 난의 시대, 왕실의 신앙
  • 탁효정
  • 승인 2021.10.2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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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여성들의 피난처이자 참회의 공간, 정업원淨業院
서울 동대문 옆에 자리한 청룡사. 건너편으로 동망봉(東望峰)이 보인다. 동망봉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단종이 유배를 떠난 영월 쪽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 나라가 개창하기까지 수많은 조력자가 존재한다.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보답하기 위해 건국자는 공신을 책봉해 벼슬을 내리고 대대손손 영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각종 혜택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 은택 중에서도 단 하나, 왕위계승권은 여러 사람에게 나눠줄 수 없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두고 개국 초에 여러 난이 발발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반복된 역사다. 

조선 개국 이후 왕실 내에는 왕위를 둘러싼 난이 수차례 발생했다. 때로는 이복형제끼리 때로는 친형제끼리 왕위를 향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패배한 이들은 목숨을 잃었고, 그들 뒤에 남겨진 이들은 오욕의 삶을 감내해야 했다. 

남겨진 자들의 결말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유배를 가거나 혹은 노비가 되거나. 그런데 왕실 여성들에게는 이를 피할 수 있는 제3의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비구니가 되는 길이었다. 출가는 세속의 모든 명예를 포기하는 동시에 패자의 과보를 면죄 받는 것이었다. 내명부(內命婦, 궁중 안에 살면서 품계를 받은 여인)의 직위를 박탈당한 여성들은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지만, 승려가 됨으로써 누군가의 아내도, 딸도, 며느리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왕실 여성들의 출가처, 정업원

조선왕조가 개창된 지 7년째 되던 해인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난이었다. 한때 이성계의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왕조 개창의 최고 조력자였던 이방원은 태조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반발해 배다른 형제인 방번, 방석 그리고 경순공주의 남편인 이제(李濟)까지 살해했다. 그리고 방석의 세자 책봉을 비호했던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들도 함께 처단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어린 두 아들과 사위가 사망하자 태조는 경순공주에게 비구니가 될 것을 권유했다. 경순공주는 신덕왕후의 소생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딸이었다. 실록에는 경순공주의 머리 깎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성계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고 기록돼 있다. 이 난으로 남편을 잃은 방석의 부인 심씨 또한 정업원(淨業院)을 통해 비구니가 됐다. 방번의 부인 왕씨는 방번의 묘 근처에 절을 세우고 남편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냈다.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태조는 왕위를 내려놓고 이 절, 저 절을 주유하며 세월을 보냈다. 죽을 때까지 이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이성계는 말년에 자신의 사저를 흥덕사라는 절로 개조해 방번 형제와 이제를 위한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방석의 부인 심씨가 정업원에 들어갈 당시에 정업원의 주지는 고려 공민왕의 후비였던 혜화궁주 이씨였다. 이씨는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한 뒤 공민왕의 후사를 낳기 위해 후비로 책봉됐다. 하지만 이씨는 공민왕의 후사를 낳지 못했고, 공민왕이 살해당한 후 정업원에 들어가 비구니가 됐다. 그리고 정업원에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지켜봤다. 혜화궁주 이씨가 세상을 떠난 후 방석의 부인 심씨가 정업원의 주지직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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