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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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
  • 현진
  • 승인 2021.09.2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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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끄리뜨 원전으로 만나는 원형의 금강경

 

산스크리트 금강경 역해
저작·역자 현진 역해 정가 28,000원
출간일 2021-09-24 분야 종교(불교)
책정보

판형_152*225mm|두께_26mm|480쪽|양장|ISBN_978-89-7479-943-4 (0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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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중생이 부처로, 번뇌가 보리로 바뀌는 대자유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위대한 경전, 『금강경』!
산스끄리뜨 원전과 한역 통합본으로 만나다


‘불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경전이 바로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불자들의 필독서임은 물론 동서양을 넘어 수많은 인문학자의 연구서로, 철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다. 이 작고 얇은 책은 당연한 실상의 세계를 모조리 깨뜨린다. 생겨남과 사라짐, 삶과 죽음, 나와 남, 있음과 없음, 주관과 객관, 성과 속, 고요와 움직임의 자리를 뒤집어놓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문을 하나씩 부숴버리는 것처럼. 마침내 그 모든 유리문이 와장창 깨지고 드러나는 본래 그 자리! 『금강경』은 모든 분별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마주하는, 생사를 초월한 대자유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가 접해 온 『금강경』은 처음 기록된 산스끄리뜨본이 아닌, 이를 한문으로 옮긴 한역 『금강경』이 대부분이었다.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산스끄리뜨본은 동투르키스탄(1900), 길기트(1931) 등에서 일부 필사본이 발견되었으며, 1990년대 바미얀에서 발견된 산스뜨리뜨 필사본으로 비교적 완전본에 가까운 『금강경』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 『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는 산스끄리뜨 원본『금강경』과 한문본을 철저히 비교한 완역본이다. 역자 현진 스님은 인도에서 8년간 산스끄리뜨와 빠알리어를 수학하고, 귀국 후에는 연구 모임을 이끌며 2,500년 전 부처님 가르침의 원음을 전하는 데 주력해왔다. 현진 스님의 역작인 이 책은 산스끄리뜨본을 먼저 번역한 후 한역본과 일일이 대조하며 용어와 표현의 차이 하나하나를 살폈다. 그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오역된 내용은 바로잡고, 한역 당시 삽입될 수밖에 없었던 중국적 사고와 문화는 걷어냈으며, 당시 원전의 뜻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인도의 사상과 문화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해설을 덧붙였다. 리얼리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산스끄리뜨 『금강경』과 핵심을 찌르는 한역 『금강경』의 장점을 모두 살린 것이다.
저자소개 위로
현진 역해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 월운당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중앙승가대학 역경학과를 졸업하고 인도 뿌나에서 산스끄리뜨와 빠알리어를 수학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 범어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편역서로는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 『치문경훈』(시공사), 『산스끄리뜨문법』·『빠알리문법』(봉숭아학당), 『빤짜딴뜨라-다섯 묶음으로 된 왕자 교과서』(아름다운인연), 『담마빠다-고려가사·한문·빠알리어로 읽는 게송과 배경담』(조계종출판사) 등이 있다.

 

역자후기

“산스끄리뜨는 어휘와 문장 속에 다양한 의미를 집약시켜 놓는 다중적 구조의 특색을 강렬하게 보입니다. 행간의 의미를 이중, 삼중으로 짜놓은 셈입니다.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원전(原典)에서 무엇을 움켜쥘 것인가는 전적으로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목차 위로

 

머리말
서설_산스끄리뜨본 금강경 사본의 현황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제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제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제9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제12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제13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제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제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제20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제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제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제25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제28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제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제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제31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미주
참고문헌

상세소개 위로
산스끄리뜨 원전으로 다시 읽는 『금강경』!
습관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만나다


붓다가 제자 수보리와의 문답을 통해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혜를 밝힌 경전 『금강경』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 사상’의 기초가 되는 내용과 함께 보살행에 대해 서술한 대승불교 초기에 기록된 핵심 경전이자 철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는 경전이다. 수많은 경전 가운데에서도 주석서나 강설서가 가장 많은 경전이라는 것은 『금강경』이 얼마나 중요한 경전인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붓다의 가르침이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반증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접한 『금강경』은 최초 기록본인 산스끄리뜨본이 아니라 이를 한자로 옮긴 한역본 『금강경』이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었던 당시 함께 전해진 것이 한역 『금강경』이었던 데다 한자문화권인 우리나라로서는 한역 『금강경』을 훨씬 쉽게 접할 수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산스끄리뜨로 기록된 필사본이 불과 120여 년 전인 1900년 즈음에서야 발견된 탓도 있다.
번역은 본래의 주제나 의미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지지만, 번역 과정을 거듭 거치면서 번역자의 생각이나 의도, 그리고 번역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담길 수밖에 없다. 『금강경』 역시 산스끄리뜨에서 한문으로 옮겨지면서 중국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녹아들 수밖에 없었고, 이는 우리가 인도인이었던 부처님의 설법을 중국인의 시선에서 이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은 산스끄리뜨 원전 『금강경』과 대표적인 한역 『금강경』인 구마라집 스님본과 현장 스님 번역본을 함께 수록하여 리얼리티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은 살리는 동시에 한역본의 내용을 다시 한번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하였다. 특히 한역 『금강경』에 녹아 있는 중국적 사고는 걷어내고 당시 인도의 사상·문화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금강경』의 본래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그 안에 담긴 ‘일체법무아’의 가르침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산스끄리뜨의 생생한 리얼리티와
핵심을 찌르는 한역본의 장점을 모두 살리다


‘번역’은 해당 언어를 아무리 능숙하게 구사한다 해도, 원전의 정확한 뜻을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우리말 ‘붉다’, ‘빨갛다’, ‘새빨갛다’ 등의 단어를 영어나 한자로 옮길 때는 ‘red’나 ‘赤/紅’ 정도에 그칠 뿐, 그 미묘한 의미 차이를 살릴 수 없는 것과 같다.
한자로 옮겨진 『금강경』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한역본 『금강경』에 등장하는 한자 ‘상(相)’의 경우, 산스끄리뜨 원문에서는 ‘lakṣaṇa(인지되거나 감지된 결과물로서의 표시, 징후)’, ‘nimitta(세밀히 측정된 것, 정신적으로 섬세하게 가늠한 것)’, ‘saṁjñā(기억이나 경험 혹은 타인의 설명으로 보완함으로써 안다고 여기는 것)’의 세 단어로 나타난다. 하지만 언어의 특성 차이와 번역자의 판단에 따라 ‘상(相)’으로 옮기게 되었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으나, 이 때문에 헷갈리거나 오해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한편 제목에 내포된 의미도 미묘하게 다르다. 한역본의 정식 제목인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은 “금강석도 잘라버릴 수 있는 지혜로써 피안으로 건너감에 관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산스끄리뜨 경전 이름은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ṁ”으로 “금강석도 잘라버릴 수 있는 지혜로써 건너가는 상태에 관한 경전”이라는 의미다. 한역본은 이미 ‘건너감’의 명사형 종결형이지만, 산스끄리뜨본은 ‘건너가는 상태’로 현재진행형으로 해석되면서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중심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지혜로써 건너가는 상태’라는 해석에는, 이 강력한 ‘지혜’ 또한 쓰고 버릴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즉 무상(無相)의 진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금강경』에 새로운 관점을 열어 주며, 『금강경』의 깊은 세계로 한층 더 다가서게 한다.


언어학과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현진 스님의 역작
틀린 것이 아니라 다름을 살피며 더 깊어지는 『금강경』


우리나라에 산스끄리뜨본 『금강경』이 처음 번역되어 소개된 것은 2001년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를 통해서였다. 그 이후로도 몇 권의 산스끄리뜨본 『금강경』의 번역 또는 해설본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으나, 산스끄리뜨 원전과 한역본 전체를 수록하여 번역하고 비교하여 세세하게 풀어놓은 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문법이 복잡하여 배우기 어렵기로 유명한 산스끄리뜨와 한문 양쪽에 능통한 저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역자 현진 스님은 역경 불사에 매진하겠다는 서원으로, 중앙승가대학교 역경학과를 졸업하고, 인도 뿌나에서 8년간 산스끄리뜨와 빠알리어를 수학하였다. 불교 경전을 기록한 모든 언어에 능통한 스님은 귀국 후 부처님 가르침의 원음을 전달하고자 봉선사 범어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연구 모임과 강의를 개설하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산스끄리뜨와 빠알리어를 접할 수 있도록 학습용 교습서를 무료로 배포했다.
그런 스님에게 『금강경』은 특히 의미가 있는 경전이었다. 인도 유학 시절, 산스끄리뜨 원문 독해를 시도했으나 당시에는 함께 공부하고 읽을 사람이 없어 잠시 중단했다. 그러다 귀국 후인 2016년 다시 모임을 열어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 문장씩 정리하였다. 2,500년 전 부처님 뜻은 물론 산스끄리뜨로 기록한 옛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오늘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나아가 책으로 묶었을 경우 100년, 1,000년 뒤 미래의 사람들은 어떻게 읽을지를 간파해야 하는 긴 고뇌의 시간이었다. 역자의 이러한 간절한 원력과 치열한 공부의 결과물인 이 책은 우리에게 부처님 원음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한다.


현진 스님의『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 이것이 다르다!

1. 산스끄리뜨 원전과 한문본을 비교하고 그 차이를 추적, 완벽에 가깝게 번역했다.
2. 산스끄리뜨 원어에 깃든 의미와 맛을 세세하게 살렸다.
3. 구마라집 스님과 현장 스님의 한역본의 용어와 표현을 하나하나 비교했다.
4. 원전 이해에 방해가 되는 한역본의 중국적 사고와 문화를 걷어내고 당시 인도의 사상과 문화적 배경을 풍부하게 담았다.
5. 한역본에서 누락되거나 오역된 부분은 바로 잡았다.
6. 인도 원음의 생생한 리얼리티와 핵심을 찌르는 한역본의 장점, 모두를 살렸다.
책속으로 위로

출가한 비구가 지닐 수 있는 여섯 가지 물품[比丘六物] 가운데 세 벌의 옷과 한 벌의 발우[三衣一鉢]가 있듯이, 출가 수행자의 옷은 ① 내의(內衣)로 불리며 취침 등 일상생활 때 항상 입고 있는 바탕옷인 안타회(安陀會, antarvāsas)와 ② 상의(上衣)로 불리며 예불・청강・포살 등 각종 법회 때 덧입는 윗옷인 울다라승(鬱多羅僧, uttarāsaṁga), ③ 대의(大衣)로 불리며 설법할 때와 탁발하러 나갈 때 그리고 왕궁에 들어갈 때 입는 정장인 승가리(僧伽梨, saṁghāṭī)로 나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은 중국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며, 인도 초기 승가의 삼의와 다르다. 초기 승가에서는 더운 여름에는 한 겹의 옷인 안따르와싸스(antar[안쪽]+vāsas[옷])를 입고 지내다가 조금 쌀쌀해지면 덧옷인 웃따라쌍가(uttara[위에]+āsaṁga[걸치는])를 입었으며, 상가띠(saṁghāṭī[연결해주는 것])는 옷의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일종의 예복이자 정장이라고 할 수 있다.

— 본문 29~30쪽

바라밀의 산스끄리뜨인 빠라미따(pāramitā)는 '피안으로(pāraṁ) 건너가는(√i) 것(tā)'이라는 의미이다. 보시바라밀은 '보시+피안으로+건너가는+것'이란 구조의 복합어인데, 이 복합어를 문법적으로 어떻게 풀이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우선 '피안으로+건너가는+것' 부분은 피안(pāra)에 격조사를 갖춘 상태이므로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란 의미로 확정되어 있다. 따라서 '보시'에 어떤 격조사를 붙이는가에 따라 전체 의미가 결정된다. 총 일곱 가지 격조사 가운데 문맥상 가능성을 지닌 경우는 도구격과 소유격이다. ① 도구격을 적용하면 '보시로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 되니 보시를 뗏목 삼아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이며, ② 소유격을 적용하면 '보시의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 되니 보시라고 일컫는 피안으로 온전히 건너가는 것이란 의미이므로 흔히 일컫는 '보시의 완성'에 해당한다. (…중략…) 만약 위격(爲格)을 적용한다면 '보시를 위해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 되니, 보시를 행하기 위해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피안은 보시를 행하기에 아주 좋은 보시정토(布施淨土) 같은 곳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 본문 56~57쪽

중국에 정착된 사상의 개념은 앞서 산스끄리뜨 원전을 통해 살펴본 원래의 개념과 제법 차이를 보인다. 이는 사상의 개념이 잘못된 내용으로 전달되었다거나 후대의 주석가들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였다기보단 달마의 가르침이 중국 특유의 조사선불교로 정착하였듯이, 그것을 자신들에게 필요한 내용으로 각색하여 이해하고 신행이나 수행에 접목시킨 것이라 보인다. 아무래도 인도인에 비해 해탈의 개념이 피상적으로밖에 와닿지 않음은 물론, 아뜨만을 고유불변의 실체로 여기고 말고와 관련된 흔적을 자국 문화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중국으로선 굳이 그 개념을 도입해서 자국 문화에 심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좋다는 것도 아니요, 결국엔 흔적도 없이 없애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임에랴. 그러다 보니 아상류(我相類)에 속하는 모든 상은 원래의 개념, 즉 무엇은 어느 외도 집단에서 혹은 내부의 특정 부파에서 고정불변의 실체로 산정하였다는 등의 내용은 아뜨만과 더불어 간과되고 새로운 내용으로 풀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생상의 중생(sattva)이라는 개념 또한 인도의 원죄론(原罪論)과 중국의 군집론(群集論)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메꿔지기 어려운 까닭에 중국에선 달리 해석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 내용이 우리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니, 그래선지 ‘아상이란 '나입네' 하는 생각이고, 인상이란 '나는 사람입네' 하는 생각이며, 중생상이란 사람인 우리는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고, 수자상이란 우리는 모두 고귀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라는 내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 본문 81~82쪽

비법(非法)은 법에 맞지 않는 것으로서, 계법에 어긋나는 삿된 법이나 법의 진실을 가로막아 번뇌를 유발하는 견해 등을 가리킨다. (…중략…) 그런데 이와 같은 일반적인 비법의 의미에 상(相, saṁjñā)을 결합할 경우 그 의미가 '법답지 못한 것[非法]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생각[相]'이 되어버리므로 『금강경』의 전체적인 문맥에 맞는 혹은 의도하는 의미가 아니게 된다. 한문 '비법(非法)'에 대한 산스끄리뜨 표기가 'adharma' 외에도 abhāva(결여, 결핍), akalpika(무분별), anyāya(불법적인 행위), asat(실재가 아닌, 허위의) 등으로 다양하듯이 'adharma'의 번역어로서의 비법 또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데, 비법상이 법상과 한 짝을 이뤄 언급될 때는 순차적으로 법상은 '어떤 법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생각'으로, 비법상은 '비법이라는 상'이 아닌 법상을 비(非)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법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생각을 그르다 여김'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법상은 물론 나아가 비법상도 갖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대승 수행자라면 어떤 법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생각을 가져선 안 되며, 그렇게 법상을 떨치고 난 후엔 법상을 떨칠 때 견지했던 생각인 '어떤 법이라도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생각은 그르다 여김'마저 내려놓아야 온전한 무아(無我)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이다.

— 본문 118~119쪽

'ātmabhāva'는 ātman(아뜨만, 自我)과 bhāa(존재하는 것, 存在・眞實)의 복합어이다. (…중략…) 복합어인 이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ātman(아뜨만)+bhāva(존재)'이므로 '아뜨만이 존재(bhāva)하는 상태'나 '아뜨만이 실체화된(bhāva) 상태'로서 몸이나 신체를 가리키는 말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산스끄리뜨에서 'ātman'이나 'bhāva' 모두 철학적인 의미가 매우 폭넓게 주입된 단어인 까닭에 'ātmabhāva'라 하면 더 깊은 의미가 부여된 단어로 보이지만 단순히 몸이나 신체를 가리키는 말로 정착되어 사용된 단어이다. 구마라집 스님은 오해가 발생할 여지를 없애려는 뜻에서인지 '신(身)'이라는 한 글자로 대체해서 옮겨놓았으나 현장 스님은 다른 번역어들처럼 글자옮김하여 '자체(自體)'라 하였다.

그럼에도, 본문의 'ātmabhāva'는 단순히 몸 또는 신체의 의미로만 쓰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중략…) 문맥의 흐름에 따라 ‘몸이란 물질에 'ātmabhāva'가 있을 수 있다면’이란 내용으로 본다면 'ātmabhāva'는 물질의 상대어인 '정신' 정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통용되는 의미가 아니라 어원에 따라 의미를 다시 정리해보면 'ātma(아뜨만)+bhāva(된 것)'에서 유추될 수 있는 내용은 ‘아뜨만이 된 것, 아뜨만으로 된 것, 아뜨만이 실체화된 것, 아뜨만으로부터 형성된 것’ 등을 비롯하여 ‘자체(自體), 자아체(自我體), 자성체(自性體), 신명(身命)’ 등인데, 통용되는 현대어의 의미까지 고려하면 '신명'이 이 문장에서 의도하는 의미에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중략…) 'ātmabhāva'를 신명으로 번역할 경우, 'ātma'는 '명'에 해당하고 'bhāva'는 '신'에 해당하여 '몸(身=bhāva)으로 구체화된 목숨(命=ātman)'이라는 산스끄리뜨식 의미를 갖춘 한문이라는 점에서 '몸과 목숨'이라는 현대 통용어와 약간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 본문 189~191쪽

'가리'는 'kali(싸움)+aṅga(신체)'에서 형성된 kaliṅga(교활한, '까링가'라는 나라 이름)를 소리옮김한 말로서 까링가라는 나라의 이름이자 그 나라의 극악무도한 임금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래가 인욕보살이었을 때 왕은 자신의 궁녀가 보살 앞에서 얌전히 설법을 듣고 있는 모습에 질투를 일으켜 보살의 사지를 자르고 해코지하였으나 보살은 아프다거나 괴롭다는 마음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여래께서 수행하던 때 국왕이 된 적이 있었는데 십선(十善)을 닦아 그 나라 사람들을 이롭게 하였기에 그 나라 사람들이 그 왕을 칭송하여 '가리(歌利)'라 하였다. 왕이 최고의 깨달음을 위해 인욕을 닦을 때 제석천이 미천한 신분으로 다가와 왕에게 고기를 구걸하자 왕이 자신의 몸을 베어주며 조금의 화를 내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는 설화도 함께 전해진다. 그러나 나중의 설화는 소리옮김된 이름인 '가리(歌利, 이익 줌을 노래함)'의 글자 뜻에 근거하여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장 스님이 이미 음차된 말이 있음에도 굳이 '갈리(羯利)'라고 고친 것도 이와 같이 잘못된 전설이 생긴 것에 기인된 것일 수도 있다.

— 본문 246~247쪽

'여래(如來)'는 'tathā(그렇게, 如)+āgata(온, 來)'를 글자 의미 그대로 옮긴 말인데, 분석을 'tathā(그렇게, 如)+gata(간, 去)'로 할 경우엔 여거(如去)로 옮길 수 있다. 여래는 수행을 완성한 완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가리키는데, 진실인 해탈에 이르렀다는 의미에서 이른 말이다. 해탈에 이르렀으므로 오고감에 자재한 까닭에 여래여거(如來如去)라고도 일컫는데, 'tathāgata'는 두 가지 연성으로 끊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이미 여래여거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여래는 불교뿐만 아니라 당시 인도의 모든 종파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호칭이었다. 자이나교에선 수행의 완성자를 'tathāgaya'라고 하는데 'ta'와 'ya'는 의미에 차이가 없는 조사이므로 'tathāgata'와 같은 말이다.

— 본문 312~313쪽

'이 법[是法]'이란 사상(四相)을 비롯하여 모든 상을 없애라는 세존의 가르침이니, 즉 무아법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였으니, 무아법이 곧 더 이상의 것이 없는 최상의 깨달음이요 해탈로 나아가기 적절한 깨달음이며 앞서 수행을 완성한 이들의 깨달음과 같이 완벽한 깨달음이란 의미이다. 이 가운데 'samaḥ(같다)'를 '무아법은 여래법과 동등함'으로 본다면 ‘이 법인 무아법은 앞서 깨달음을 완성한 여래의 법과 동등하여 여래법과 무아법 그 둘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그래서 무아법은 무상정등각이라 일컬어질 수 있다.’라는 내용이 된다. 또는 '무아법은 모두에게 평등함'으로 본다면 ‘이 법인 무아법은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어서 무아법을 깨달으면 누구라도 해탈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됨에 있어서 그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아법을 무상정등각이라 일컬을 수 있다.’라는 내용이 된다. 그런데 앞서 세존께서 옛적 연등불의 처소에서 수기를 받은 일을 논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고정된 법[定法]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무아법이 여래법과 동등하다 할 때 그 내용이 같은 하나의 법으로 본다면 정법이 존재하며 그것이 곧 무아법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여기는 것이므로 옳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무아법은 여타의 여래법처럼 완벽하게 깨달은 점은 같을지언정 동일한 내용의 법은 아니다.

— 본문 374쪽

'bāla(愚夫)+pṛthakjana(異生)'에서 'bāla'는 어린아이 또는 어리석음을 의미하고, 'pṛthakjana'는 신분이 낮거나 천박하거나 우둔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pṛthakjana'는 다시 pṛthak(개별적으로, 분리되어, 떨어져)과 jana(태어난, 사람)로 나눠지는데, 어리석은 이는 온갖 업을 짓고 그에 따라 하늘길이나 인간길인 선취(善趣)나 지옥길이나 아귀길 또는 축생길인 악취(惡趣)로 그 태어나는 장소가 각기 다른 까닭에 '분리되어 태어남'이라 일컫는다. 구마라집 스님은 이를 범부(凡夫)라 번역하였다. 'pṛthakjana'는 불교 이전 브라만교에서도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불가촉천민처럼 아주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 태생 자체가 브라흐만과 합일될 수 있는 신분에서 아주 분리된 상태에서 태어난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불교에선 이런 용어를 통상적인 중생 또는 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천민도 비구로 받아들이는 등의 일과 함께 계급타파의 실질적인 행위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본문 388~389쪽

삔다(piṇḍa, 01-02 '乞食' 항목 참고)는 조상에게 젯밥을 올리거나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릴 때나 걸인의 구걸에 응하는, 경단같이 뭉친 모양새의 음식물을 말한다. 삔다 자체에 덩어리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grāha'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므로 'piṇḍagrāha'는 삔다 같은 덩어리, 즉 몇 가지 음식물을 손으로 조물락거려 뭉쳐서 덩어리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세계 영역이 존재한다면 하나의 삔다 덩어리와 같을 것이라 하였으니, 이 세계 영역은 마치 삔다가 갖가지 음식물이 모여 하나의 경단을 이루고 있듯이 갖가지 인연이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하여 상(相, lakṣaṇa)을 이루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삔다란 갖가지 음식물을 뭉쳐놓은 것을 단지 그렇게 이름할 뿐, 그 자체가 갖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갖가지 음식물도 그러하여 그 가운데 하나인 밀전병이라면 밀가루를 비롯하여 물과 소금 등 몇 가지 향신료가 적절히 배합된 것을 조리기구에서 구워낸 것일 뿐 그 자체로 변치 않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과 소금이나 향신료 또한 여전히 그러할 뿐이다. 세상도 이처럼 인연의 화합물로 연기(緣起)한 것이지 어느 하나 움직이지 않고 항상 '그것'으로 남아 있는 실체를 지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삔다 또한 삔다가 아니니, 그래서 삔다라 일컬어질 수 있다. 음식물의 인연화합인 삔다처럼 세간인연의 화합물인 세계 영역도 그와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 본문 431~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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