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도 만들지 못한 3등신의 미소
창령사 터 오백나한의 미학적 요소들
창령사 터 오백나한의 미학적 요소들

크기의 미학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이 생명체의 운명이라서일까? 우리는 평범한 것을 배경 삼아 탁월한 것을 부각하고 그것을 삶의 모델로 삼는 일이 많다. 작고 미소한 것에 대해선 눈도 주지 않지만 크고 거대한 것은 ‘위대하다’며 경의를 표한다. 거대한 바위, 거대한 산, 거대한 폭포, 거대한 계곡…. 서양 미학의 중심 범주 중 하나인 ‘숭고’는 칸트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우리를 압도하는 수학적 크기 또는 물리적인 힘의 크기로 발생하는 미적 현상이다. 거대한 것은 그 앞에 선 자신의 크기를 작고 미미하게 만들지만, 그렇기에 거꾸로 그 거대한 것에 자신을 ‘고양’해 그 거대한 힘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위대함을 추앙하는 세계에선 예술가들 역시 거대함을 위대함으로 색칠하는 숭고의 미학에 쉽게 숟가락을 얹는다. 서양만 그런 것도 아니다. 동양의 불상들에서도 부처의 위대함에 거대한 크기를 부여하려는 욕망은 빈번히 발견된다. 가령 일본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나, 카마쿠라 고도쿠인(高德院)에 있는 대불상은 그 욕망이 나름 멋진 형상을 산출한 경우라 할 것이다. 법주사의 거대한 불상은 크기에 대한 욕망이 철근 콘크리트에서 이상적 재료를 찾을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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