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 우리 얼굴로 다시 태어난 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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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 우리 얼굴로 다시 태어난 나한
  • 이진경
  • 승인 2021.08.3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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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도 만들지 못한 3등신의 미소
창령사 터 오백나한의 미학적 요소들
가사 덮어쓴 나한상, 국립춘천박물관. 

 

크기의 미학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이 생명체의 운명이라서일까? 우리는 평범한 것을 배경 삼아 탁월한 것을 부각하고 그것을 삶의 모델로 삼는 일이 많다. 작고 미소한 것에 대해선 눈도 주지 않지만 크고 거대한 것은 ‘위대하다’며 경의를 표한다. 거대한 바위, 거대한 산, 거대한 폭포, 거대한 계곡…. 서양 미학의 중심 범주 중 하나인 ‘숭고’는 칸트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우리를 압도하는 수학적 크기 또는 물리적인 힘의 크기로 발생하는 미적 현상이다. 거대한 것은 그 앞에 선 자신의 크기를 작고 미미하게 만들지만, 그렇기에 거꾸로 그 거대한 것에 자신을 ‘고양’해 그 거대한 힘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위대함을 추앙하는 세계에선 예술가들 역시 거대함을 위대함으로 색칠하는 숭고의 미학에 쉽게 숟가락을 얹는다. 서양만 그런 것도 아니다. 동양의 불상들에서도 부처의 위대함에 거대한 크기를 부여하려는 욕망은 빈번히 발견된다. 가령 일본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나, 카마쿠라 고도쿠인(高德院)에 있는 대불상은 그 욕망이 나름 멋진 형상을 산출한 경우라 할 것이다. 법주사의 거대한 불상은 크기에 대한 욕망이 철근 콘크리트에서 이상적 재료를 찾을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압도적인 힘을 내세우는 종교와 이념은 사람도 삶도 그 힘에 복속시키며, 숭고의 감정이 제공하는 ‘고양’이란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채서였을까? 창령사의 나한들은 크지 않으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하지도 않는다. 나한이란 분명 더 배울 것도 없고 더 닦을 것도 없는 최고 경지에 오른 존경받을 만한 수행자들이다. 최고의 경지란 중생보다 훨씬 탁월하고 위대한 크기의 힘을 지녔다는 의미다. 하지만 창령사의 나한은 이에 기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우리 자신의 힘과 크기에 대해 스스로 믿도록 하려는 양, 아주 작은 크기의 돌 속에 자리 잡는다. 

거대한 크기는 일상과 분리된 세계를 일상 속에 가시화하려는 욕망과 연결된다. 소소하고 평범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들과 확연하게 구별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크기의 차이에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크기의 불상은 중생과 다른 성스러운 얼굴과 균형감 있고 빈틈없는 정연한 자세가 상응한다. 이와 반대로 ‘만만하고’ 평범한 크기의 소박한 창령사 나한상은 일상적인 얼굴과 빈틈 있는 자세가 짝을 이룬다. 어떻게 보아도 성스러운 분위기는 없으며, 과도하다 싶을 만큼 익숙하고 친근한 형상이어서, 유별난 성인(聖人)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근의 평범한 이웃들 같다. 그런 방식으로 피안 아닌 차안, 중생들 사는 세간 속에서 남들 편안하게 해주는 게 나한임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 저분들이 나한이듯 우리 자신 또한 본래 부처라지? 그렇게 자신의 부처됨을 믿고 부처처럼 산다면, 애써 깨달을 것도 없이 부처로서 사는 것이라지?’라고 믿도록 말이다. 

물론 가르침의 중심에 나한 개념이 있던 초기불교와 중생 자신이 모두 본래부처라고 가르치던 대승불교가 같지 않음을 지적하며, 이런 해석을 비판하는 분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나한이란 대체로 석가모니와 초기불교의 거처인 인도 출신이기에, 이토록 한국인을 닮은 나한이란 애초부터 잘못 만들어진 불상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타지역에서 살았던 이국적인 나한들조차 자신들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 이를 위해 나한을 자신들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키는 것, 이는 오해나 무지의 증거가 아니라 완전히 숙성시켜 자기화한 징표이다. 흑인의 몸과 얼굴을 하고 색소폰을 손에 든 불상을 보게 된다면, 그때는 흑인들의 세계에 불교가 깊이 스며들어 그들의 삶이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정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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