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 오백나한이 된 신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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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 오백나한이 된 신라승
  • 계미향
  • 승인 2021.08.3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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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존경받는 나한
신라승 무루, 무상, 오진
티베트 불교는 18나한 중 17번째 달마다라를 신라승 무루로 보고 있다. 중국 돈황탱화 <보승여래상>,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필자 제공.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 사찰에서는 대부분 나한을 모시고 있다. 나한은 범어 arhat의 음역으로, ‘응진(應真)’·‘응공(應供)’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상좌부불교 수행자가 도달하는 최고의 과위(果位,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의 지위)로, 생사번뇌를 끊어 무여열반의 경지에 오른 존재를 가리켰다. 후에는 아라한과를 얻은 스님을 일컫는 말이 됐다. 

나한은 불·보살에 비해 그 지위가 낮아 주로 ‘전(殿)’이 아닌 ‘당(堂)’에 안치되지만, 중국인들은 살아있는 인간이면서 뛰어난 수행력으로 일체의 욕망을 단절하고 생사번뇌를 끊은 존재인 나한을 ‘금신(金身)’으로 모시고 신앙 대상으로 삼았다.

사찰의 규모나 성격에 따라 나한의 수에도 차이가 있어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등이 봉안된다. 현장이 번역한 『법주기(法住記)』에 처음 보이는 인도의 16나한이, 중국문화의 길수인 ‘8’의 영향으로 당 말에는 경우(慶友)와 빈두로존자가 추가돼 18나한이 되었다. 또 오대에는 나한의 회화, 조각이 유행하며 18나한은 다시 오백나한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8세기에 중국에서 활동했던 신라승 무루(無漏), 무상(無常), 오진(悟眞)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중국인들에 의해 나한으로 존숭받으며 신앙 대상이 됐다. 무루는 티베트의 18나한 중 17번째인 복호나한(달마다라)으로, 무상과 오진은 오백나한의 455번과 479번에 입전(入傳, 모셔지다)된 것이다.

 

복호나한 무루

8세기 중엽에 당의 현종과 숙종 부자는 ‘안사(安史)의 난’(755년)으로 장안을 떠났다.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촉(사천성)으로 몽진하던 중 양귀비의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 실의에 빠진 현종은 당시 사천성에 있던 신라 왕자 출신의 정중 무상 선사에게 귀의했다. 

같은 시기에 숙종은 닝샤(寧夏) 하란산(賀蘭山) 인근의 실크로드 도시 영무(靈武)에서 즉위(756년)했다. 숙종은 ‘보승불(寶勝佛)’을 염하는 신이한 스님을 여러 번 현몽했고, 그가 하란산에서 수행하던 신라승 무루임을 알게 되었다. 무루는 육로로 천축구법행(인도로 법을 구하러 떠남)에 나섰다가 총령에서 발길을 돌려 하란산에서 두타행을 하고 있었다. 숙종은 삼고초려 끝에 마침내 장군 곽자의(郭子儀)를 보내어 무루를 모셔왔다. 무루는 안사의 난이 끝난 후 장안의 황궁에서 불공 삼장과 함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주관하다가 758년에 입적했다.

약 300년 후, 티베트 불교권인 닝샤에 서하국(西夏國)이 건국됐고, 서하인들은 하란산의 신승 무루를 18나한의 하나인 달마다라(Dharmatrāta, 법구法救·법증法增)로 상정했다. 중국과 달리 티베트 불교에서는 16나한에 달마다라와 포대화상을 더하여 18나한으로 한다. 그 중 달마다라는 호랑이를 거느린 행각승으로 표현되어 복호나한(伏虎羅漢)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복호나한은 보승불의 이명으로, 서쪽을 수호하며 천축구법승을 수호하는 존재이다. 

보승여래는 ‘나무서방보승여래(南無西方寶勝如來)’(『불설칭찬여래공덕신주경(佛說稱贊如來功德神呪經)』)라 하여 서방을 호지하는 존재이기에, 천축으로 경전을 구하러 가는 구법승들(행각승)에게는 일종의 호신불이자 경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당 말부터 오대, 송대까지 행각승을 보승여래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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