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귀의청정歸依淸淨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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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귀의청정歸依淸淨 맹세
  • 홍성민
  • 승인 2021.07.2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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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과 입적
<예서대련(隸書對聯)>, 각 129.5×31.9cm, ⓒ간송미술재단. 평범한 삶이 가장 값진 진리라는 것을 추사는 숱한 풍상을 겪은 고희가 되고서야 알게 된다. 그의 마지막 예서체 대련인 <대팽두부(大烹豆腐)>는 70세가 된 추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추사는 북청에서 만 1년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으로 돌아온다. 그곳은 예전에 부친 김노경이 별서(別墅)로 마련해둔 곳으로, 추사는 여기에서 4년간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71세로 생을 마감한다.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은 이때 추사의 삶을 “그 생활은 처연하고 담담하고 편안했다. 결코, 몰락한 귀족이 갖는 비애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불교적 의미로 마음의 비움 같은 것이었다”고 평한다. 

이 시절 추사는 자신을 노과(老果)·과형(果兄)·과산(果山)·과파(果坡)·과칠십(果七十)·칠십일과(七十一果) 등으로 표기했는데, 이것은 단지 자신이 과천 사는 사람임을 나타내려는 것만은 아니었으리라. 추사에게 과(果)자는 고단한 인생의 과보(果報)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기 학문과 예술의 완성일 수도 있겠고, 궁극적으로는 도달하고 싶은 택멸(擇滅)의 이계과(離繫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릭슨(Erikson)은 이런 말을 했다. “노년에 필요한 것은, 인생 전반을 관조하여 자기의 모든 과거를 수용하고 삶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적 차원의 초월로 이어진다”고. 추사는 과천에서 이런 열매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늙은 천재의 평범 속 비범

추사의 삶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금수저인 데다 천재였고 노력파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점은 그 천재성의 그림자, 즉 모나고 오만한 성격이었다. 추사 자신도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이라고 말할 정도로 직설과 독설은 너무도 유명하다.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과장된 오만함도 잘 알려져 있다. 김영한은 『완당전집』 서문에서 추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강직하고 모난 성품과 고결한 행실이 문제였다. 추사 선생은 스스로 재능을 감추고 세상의 속인들과 어울리지 못했기에, 봉록과 작위를 잃고 말았다. 선생을 미워하는 이들은 그 단점을 날조하여 퍼뜨리고 공격하였고, 급기야 선생은 세상에서 신뢰를 잃고 말았다.”

결국, 오만한 천재는 8년을 원악도에서 다시 1년을 북청에서 신산(辛酸, 세상살이가 고됨)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이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과천으로 돌아온 어느 날 촌 동네 노부부를 만나고서 그는 자기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길가 마을 집이 옥수수밭 가운데 있는데 거기에서 두 늙은 영감 할멈이 희희낙락하며 자득하고 지낸다. 그래서 내가 영감 나이가 몇이냐  하니 일흔 살이라 한다. 서울에 가본 적이 있느냐 했더니만 평생 관가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무얼 먹고 사느냐고 물으니 옥수수를 먹는다고 한다. 나는 평생 남으로 북으로 부평초처럼 떠다니며 비바람에 휘날리고 부대끼며 살았다. 그 늙은이를 보고 그의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망연자실해졌다.

한 그루 늙은 버들 두어 서까래 집에(禿柳一株屋數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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