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경전은 부처님 말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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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경전은 부처님 말씀이 아닌가?”
  • 정병삼
  • 승인 2021.07.2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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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선일치敎禪一致
간화선 위주 수행 풍토에 일침
고창 선운사 백파율사비. 추사 김정희가 백파의 업적과 인품을 기리며 찬양하는 비문을 썼다. 

19세기 조선 사회는 변화의 시기였다. 성리학 사회를 재정립하려던 정조의 노력이 뜻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세도정치의 격랑에 휩쓸리면서 새로운 모색을 도모하던 여러 주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청나라 학문의 대세였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관점으로 이 시기 새로운 시대사조를 이끈 중심인물이었다. 

추사는 불교에도 해박한 식견을 가졌는데, 선대부터 내려온 불교 신앙으로 불교를 가까이하여 충남 예산 향저 인근의 화암사를 중수하고 사경 공덕을 쌓기도 했다. 추사는 백파와 초의를 비롯한 당대의 고승들과 깊은 교류를 가지는 한편 불교의 정수를 표상한 듯한 명작 <불이선란(不二禪蘭)>을 남기기도 했다. 여러 스님에게 보낸 서신과 게송도 적지 않게 남겼고, 역대 종사들의 경지를 거론하여 평하기도 하고 선교 융합을 강조하는 논지를 펴기도 했다. 만년에는 봉은사에서 기거하며 자참(刺懺)의 실천 신행을 보였고, 봉은사에서 『화엄경』 판각 완성 즈음하여 일품 ‘판전(板殿)’ 현판을 써 남겼다.

 

강학의 성행과 백파의 수선결사

16~17세기에 스님들은 선 수행을 중심에 두되 교학 수련과 염불도 병행하는 삼문(三門) 수학을 보편적으로 따랐다. 주요 사찰에 열린 강원에서는 10년 정도 기간에 사미, 사집, 사교, 대교과의 이력(履歷)을 차례로 이수했다. 이에 따라 선에 뛰어난 종사(宗師)와 강학으로 이름을 날린 강사(講師)가 나란히 존경받았다. 청중들은 화엄을 중심으로 한 강의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은 당시의 선문을 대표하는 대종장이었다. 백파는 56세 때 화장대 소림굴에 수선결사(修禪結社)를 열어 교와 선의 균형 있는 탐구를 지향하는 새로운 불교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수행의 결의를 다지는 『수선결사문』에서 ‘배우는 이는 돈오점수의 두 문을 명확히 안 연후, 교의를 놓아버리고 일념으로 선지를 참구해 새로운 활로를 얻자’고 역설했다. 

백파는 서산에서 환성으로 이어지는 임제 우위의 선 사상을 계승해 전통적인 선론을 재정립하고 『선문수경(禪文手鏡)』으로 정리했다. 백파는 임제삼구를 근본 명제로 삼아 삼종선설(조사선, 여래선, 의리선 등 3종으로 선을 구분)을 제창하고 이로써 교학을 포괄하고자 했다. 백파가 전통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새로운 삼종선설을 들고나온 것은 교학 중심으로 기울던 당시 불교계 흐름에서 선 수행의 주류를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로 이를 반박했다. 초의는 왕성한 교학 경향을 수용하여 교학과 선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주장했다. 

이 시기에 사족(士族, 선비나 무인 집안 또는 그 자손)과 스님의 교유는 그 폭이 확대됐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기간에 아암혜장(兒庵惠藏)을 비롯한 많은 스님과 교유하며, 대둔사 「만일암지」와 「만덕사지」와 같은 불교 사서의 편찬에도 도움을 주었다. 백파는 추사와 깊은 교분을 나누었고, 당대 권문을 대표하는 김조순과도 교분이 깊었다. 김조순은 백파의 『수선결사문』 서문을 썼고, 백파의 「소림굴 선교결사회기」는 기정진이 썼다. 불교는 물론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초의는 홍석주와 신위, 추사 등 대표적인 문사들과 시문으로 교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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