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불교] 부처님의 나라,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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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불교] 부처님의 나라, 백제
  • 조경철
  • 승인 2021.06.2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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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드높고 은미한 이름 백제 불교 | 오랜 전생의 업을 맺다
뚝섬 출토 여래좌상. 우리나라 최초 불상으로 알려진 이 여래좌상은 백제 불상인지 전고려 불상인지 확실치 않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라 말 고려 초 경남 창원 봉림사의 진경 대사 심희에게 누군가 물었다.

“스님은 왜 중국 유학 안 가십니까?”

“이미 여러 선승이 중국에서 달마와 혜가의 선종을 배워왔거늘 굳이 또 유학 갈 필요가 있겠느냐?”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인 이후 그 사상과 종교는 변하기 마련이다. 받아들인 나라의 역사와 풍토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변한 모습을 보지 않고 중국에서 받아들인 모습 그대로만 해석하는 것은 중국사이지 한국사가 아니다. 백제 불교도 마찬가지다. 불교를 중국에서 받아들였지만, 중국사와 백제사의 전개 과정이 달랐다. 역사에 녹아든 불교도 중국 불교가 아닌 백제 불교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백제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은 도읍을 여러 번 옮겼다는 점이다. 더구나 한성에서 웅진으로의 천도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벌어진 천도였다. 백제의 개로왕이 전고려(=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임을 당했다. 개로왕의 동생 문주는 할 수 없이 웅진까지 내려와 웅진에 새 도읍을 정했다. 백제 역사의 트라우마는 웅진 천도였고 백제사의 전개 과정은 이 트라우마의 극복과정이었다.

 

한성 시기 불교수용, 10인의 도승과 도림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 동진의 마라난타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동진이 전진과 비수의 싸움에서 승리한 1년 뒤였다. 백제는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백제의 왕계는 고이계와 초고계로 나뉘는데, 불교를 통해 두 왕계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왕실에선 어머니 아이부인이 병약한 침류왕의 건강을 위해 불교수용에 적극적이었다. 이듬해 백제는 한산에 절을 짓고 10명의 스님을 배출했다. 10인은 3사7증을 말한다. 3사7증은 구족계를 받을 때 있어야 할 세 사람의 스승과 일곱 사람의 증인으로 백제는 일찍부터 스님을 배출할 수 있는 기본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침류왕의 아들 아신왕은 ‘널리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란 교서를 내려 백성들에게 불교를 믿을 것을 독려했다.

개로왕 때 전고려의 스님 도림이 백제에 거짓으로 망명하여 정보를 자기 나라에 넘겼다. 도림이 승려 자격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백제에 불교가 널리 퍼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북조의 불교에 밝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림을 통해 백제도 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웅진 시기 법화신앙과 대통사

전고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임을 당했다. 문주왕이 급히 웅진으로 천도했지만,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문주왕은 시해되고 삼근왕은 어린 나이에 죽고 동성왕도 시해당했다. 무령왕 때 가서야 중국 양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됐다. 무령왕은 겸익을 인도에 보내 범본 율장을 가져오게 했다. 중국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은 율장이 궁금했고 해이해진 불교계를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겸익은 성왕 때 귀국해 율장을 번역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아버지 무령왕의 3년 빈상(殯喪)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무령왕의 명복을 빌고자 대통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성왕은 평상시 이름이기도 하고 죽은 뒤 시호로도 사용됐다. 유교적 의미와 불교적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는데 불교적 의미에선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상적인 왕 전륜성왕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왕이 ‘대통’을 절 이름으로 삼은 건 『법화경』 「화성유품」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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