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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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다
  • 백승권
  • 승인 2021.05.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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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많이 하다보니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

빨간 펜 첨삭 받은 어느 교수의 글

“선생님, 오늘 수업 끝나고 저랑 한잔하실 수 있나요?”

강의를 시작하기 전 D대학 정보통신학부 유 아무개 교수가 쭈뼛거리며 말을 건넸다. 지난번 강의 때 혹독한 평가를 내려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터라 얼른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런 뒤 속으로 ‘왜 보자고 하는 걸까? 지난번 평가로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걸까?’ 은근히 마음이 켕기었다.

두 달 정도 과정으로 진행되는 직장인 글쓰기 교실엔 대략 열댓 명의 수강생이 몰려든다. 수강생 분포의 다양성만 보아도 실용글쓰기가 얼마나 넓은 범위에서 쓰이고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민간 기업, 공공기관 직원, 공무원, 연구원, 교사, 마케터, 대학생, 심지어 목사, 스님까지 이 교실을 찾아온다. 

그 가운데 유 교수는 처음 만났던 ‘현직 교수 출신’ 수강생이었다. 피부는 검지만 어질게 보이는 얼굴에 테가 두꺼운 안경을 쓴, 한눈에도 삶을 한없이 진지하게 살아갈 듯한 스타일의 중년 남자였다. 얼굴엔 늘 웃음을 띠고 있지만 강의 때는 맨 앞자리에 앉아 강의 내용을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안경 속에 눈빛을 빛냈던 기억이 지금도 떠오른다.

첫 강의가 끝나자 유 교수가 이런 제안을 했다. 그동안 전공 분야 내용으로 3권의 책을 썼는데, 냉정한 평가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3권의 책을 쓴 사람이 왜 내 강의를 듣고 있을까. 정보통신 분야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과연 내가 그걸 이해할 수나 있을까.’ 

수락하기도 거절하기도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유 교수의 간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아는 동료들 가운데는 이런 걸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요. 선생님께 평가를 받아야 지금 제가 잘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결국 유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책 전체를 살펴보기엔 너무 부담되니까, 머리말 부분만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조건을 하나 걸었다. 단순한 총평 수준이 아니라 글 전체를 첨삭할 테니 수업 시간에 공개첨삭 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유 교수는 흔쾌히 동의를 표했다.

그날 밤 유 교수는 책 머리말을 피디에프(PDF) 파일로 전송했다. 인쇄해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문장부터 빨간 펜이 그어졌다. 둘째 문장, 셋째 문장…. 첨삭을 마치고 나니 ‘내가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온통 빨간색이었다. 3페이지 가까운 머리말 문장 가운데 빨간 줄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한 줄도 없었다. 오탈자, 비문, 수동태, 어색한 표현, 모호한 내용 등등.

다음 강의 시간이 됐다. 유 교수는 이날도 책상 맨 앞에 앉아 자신의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눈빛을 빛내며 기다렸다. 첨삭 표시를 한 피디에프 파일이 빔 프로젝트 화면에 쏘아지자 유 교수의 입에서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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