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철학 시점] 돈은 똥! 쌓이면 악취, 흩어지면 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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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철학 시점] 돈은 똥! 쌓이면 악취, 흩어지면 거름
  • 이일야
  • 승인 2021.03.30 1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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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와 풀소유 |

무소유와 풀소유, 대립 관계인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아이콘 법정 스님의 스테디셀러 『무소유』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래전 이 말에 꽂혀서 20년 넘도록 실천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바로 세탁기 없이 생활하는 것이다. 물론 세탁기가 필요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수행으로 여기면서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문득 세탁기가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손빨래를 고집하면서 살고 있다. 두꺼운 점퍼나 겨울 이불을 빨 때면 세탁기에 대한 유혹이 밀려오지만, 그때마다 ‘아 참, 이건 빨래가 아니라 수행이지!’ 하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다. 그 무슨 고집이냐는 주위의 지적도 있지만, 마음의 근육이 아직까진 잘 견뎌내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난해 풀소유 논란에 휩싸인 어느 스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 스님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가치 판단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사건 이후에 보인 스님의 태도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거들고 싶다. 사람이란 경계에 부딪혔을 때 진짜 모습이 보이는 법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의 밑천이 드러난다는 얘기다. 스님은 대중들의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변명도 없이 쿨하게 참회하고 출가자의 본분으로 돌아가 수행에 힘쓰겠다고 했다.

『중용』에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知恥近乎勇]”라는 구절이 나온다. 평소 부끄러운 행동을 많이 하는 중생이다 보니, 이 말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채찍질하고 있다.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만 아무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용기다. 용기는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새롭게 살겠다는 발원이 있을 때만 작동하는 삶의 에너지다. 스님의 행위가 그 정도로 비난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중들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자기 성찰의 시간에 들어간 점만은 인정하고 싶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소유와 풀소유’란 이야기가 대중들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두 단어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것의 반대편에는 뭔가 가득 채우고 있는(full) 상황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반대말이 풀소유라 해도 딱히 반박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엔 뭔가 개운하지가 않다. 그래서 무소유와 풀소유는 과연 대립 관계일까 하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를 살펴보았다.

철학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사유하는 지적 활동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좀 더 합리적이고 타당한 대답을 찾아낼 수 있기에 생각하는 일은 철학의 기본 중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은 아무 때나 일어나지 않는다.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의 지적처럼 생각은 낯선 상황과 만날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예컨대 평소 긴 생머리에 치마를 고집하던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바지만 입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익숙한 상황이 아니라 매우 낯선 상황이다. 그때 사람들은 생각을 한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처럼 낯선 상황과 만나게 되면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이 좀 더 깊이 있는 사색으로 이어질 경우 잠자고 있던 삶[生]이 깨어나는[覺] 놀라운 체험을 할 수도 있다. 붓다를 출가와 깨침으로 이끈 것도 다름 아닌 낯선 상황과의 만남이었다. 평소 궁전의 좋은 환경에 익숙했던 젊은 싯다르타는 어느 날 성 밖을 나가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낯선 상황과 만나면서 삶과 죽음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잠자고 있던 그의 삶이 깨어나 출가를 하고 성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중생 싯다르타를 깨친 붓다로 이끈 비밀이 생각(生覺)에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무소유와 풀소유가 반대말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낯설게 해보면 어떨까?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충분히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를 우리는 경전이나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불교는 돈과 관계없는 철학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이 일종의 편견임을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 찜찜했던 내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질 것 같다.

 

“바보야, 문제는 집착이야”

겉으로 볼 때 무소유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소유는 마치 불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이를 훨씬 더 철저하게 실천했던 종교는 다름 아닌 자이나교였다. 자이나교는 당시 불교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던 신흥종교였다. 자이나교의 사문에게 무소유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생명과 같은 계율이었다. 예컨대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도 소유물이기 때문에 사문들은 가질 수가 없었다. 민망한 일이지만 그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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