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철학 시점] 불교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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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철학 시점] 불교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조성택
  • 승인 2021.03.3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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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철학하다 | 철학의 복권과 불교의 복원

‘전지적 철학 시점’은 다음 두 가지 점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는 “인생과 세계를 사유하며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이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도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사유해 진리에 이르는 사상이자 철학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를 전제하면서 필자에게 요청한 주제는 ‘불교를 철학하다’였다. 요컨대 삶의 양식이 되는 불교 철학에 관한 내용을 써 달라는 것이다. 

이미 전화상으로 집필 약속을 한 터라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청탁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식불교의 폐해를 주장해왔고, 필자의 관점으로 ‘불교 철학’은 지식불교의 한 전형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문득 한 의문이 들면서 관련된 질문들이 잇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획자는 왜 삶의 양식이 되는 ‘불교’가 아니라 삶의 양식이 되는 ‘철학으로서 불교’라고 했을까? 

기획자에게 ‘그냥’ 불교와 ‘철학’으로서의 불교의 차이는 무엇일까? 

기획자가 말하는 ‘철학으로서의 불교’란 ‘종교로서의 불교’와 상대되는 개념인가?      

기획자와 가상 대화를 며칠간 이어가면서 생각을 모아갔다. 필자가 평소 가져왔던 지식불교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곰곰 생각했다. 

불교가 삶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필자의 생각과 기획자의 의도는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가 삶의 양식이 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일상적 실천이 실종되어 버린 ‘철학적’ 불교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지식불교의 폐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기획자는 진지한 이성적 사유가 실종되어 버린 ‘종교적’ 불교, 오로지 불보살의 가피력에 기대고 복을 비는 신행 문화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인 필자는 왜 ‘철학’을 실천이 빠진 이론적 활동이라고만 생각하고, 기획자는 왜 ‘종교적’ 불교가 삶의 양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까? 

돌이켜 보면 기획자와 나눈 지난 며칠간의 가상 대화는 결국 불교라는 ‘하나’의 전통을 종교와 철학으로 쪼개버린 지난 역사를 반성하는 과정이었다. 불교가 철학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철학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은 별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제 필자가 무엇을 써야 할지 분명해졌다. 철학과 종교가 삶과 분리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결과적으로 삶과 유리되어 버린 불교를 어떻게 ‘삶의 철학’으로 되돌릴 것인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삶, 철학 그리고 종교: 그 분리의 배경과 역사

한·중·일 삼국의 근대화란 곧 서양의 개념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지식인들은 새로운 개념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고 자신의 전통을 되돌아보았다. 19세기 말 ‘philosophy’ 그리고 ‘religion’이라는 개념이 소개되었을 때 지식인들은 이를 각각 ‘철학’ 그리고 ‘종교’라는 말로 번역했다.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스스로 물었다. 불교는 철학인가, 종교인가? 당시 조선불교의 선각자 만해(1879~1944)는 불교는 “철학적 종교이자 종교적 철학”이라고 답했다. 불교는 이성적 합리성을 갖춘 종교이자 해탈, 자비, 열반과 같은 종교적 목표를 가진 철학이라는 의미였다. 적절한 답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만해의 ‘적절한’ 답변은 서양 지식인들은 물론 당시 기독교 세례를 받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충분히 설득할 수 없었다. 서세동점의 시대적 상황에서 철학은 이성, 종교는 신앙이라는 범주 구분은 일종의 시대적 규준 같은 것이었다. 요컨대 철학과 종교는 서로 그 영역이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어서 철학이면 종교일 수 없고, 종교이면 철학일 수 없었다. 여기에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전제로 한 기독교 중심의 종교관까지 더해지면서 불교는 철학에도 속하지 못하고 종교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상한 것’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조선 500년간의 탄압 속에 피폐해진 당시 조선불교의 현실은 자신의 정체성을 ‘현재의 불교’가 아니라 먼 ‘과거의 불교’에서 가져와야 할 상황이었다. 무력했고 미신으로 치부 당해도 항변할 논거도 지식도 부족했다.

한편 중국 청말(淸末)의 지식인 어우양징우(歐陽竟無, 1871~1943)는 종교와 철학을 대립적 구도로 설정하고 있는 질문의 함정을 간파했다. 그는 불교가 “종교도 철학도 아니(非宗敎 非哲學)”라고 답했다.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것은 [불교는 유일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전제로 한 그런] “종교가 아니”며 [이성만을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철학도 아니다”일 것이다. 이 또한 적절한 답변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서양이 모든 것의 기준과 표준이 되어버린 시대에 ‘종교’도 ‘철학’도 아닌 제3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그들을 설득하지도 못했다. 그만큼 ‘종교’와 ‘철학’이라는 범주는 강력했다. 

한·중·일 삼국의 지식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전통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갓 유럽에서 시작된 불교학의 이름으로 ‘불교’를 철학적 불교와 종교적 불교로 나누어 버렸다. 

이성적 사유와 합리적 해석을 강조하는 ‘철학적 불교’ 그리고 믿음과 수행을 강조하는 ‘종교적 불교’. 철학적 불교에는 ‘삶’이 실종되어버렸고 종교적 불교에는 믿음이 강조되고 깨달음이 신비화되면서 이성적 사유는 약화되거나 무시되어 버렸다. 1954년 출간된 『불교학개론(佛敎學槪論)』에서 김동화 선생은 불교연구를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연구의 세 분야로 나누고 철학적 분야에서 해탈론 등 실천이론을 제외하고 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불타론과 해탈론은 모두 종교적, 주관적이요, 실천적인 이론임에 대하여 법보론은 객관적인 철학적 진리를 의미한다. 불교를 단순히 종교로만 본다면 이 법보론은 기실 불필요한 이론일 것이다.” 김동화 선생은 계·정·혜 삼학(三學)에도 이러한 범주 구분을 적용하여 정(定, 선정)은 종교로서 믿음의 영역이고, 혜(慧)는 철학이자 이성적 사유의 영역이며, 계(戒)는 윤리이자 실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오랜 불교 전통에서 계·정·혜 삼학은 수행체계이자 실천방식으로 그 각각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불교에서 지혜를 뜻하는 혜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성적 사유를 강조하는 문혜(聞慧)와 사혜(思慧) 그리고 체득을 통한 수혜(修慧)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은 지혜의 내용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지혜를 획득하는 방식에 따른 구분일 뿐이다. 혜를 “철학이자 이성적 사유의 영역”으로 한정하는 순간 깨달음의 지혜에 속하는 수혜는 일상의 경험을 떠난 종교적 영역으로 분리돼 버린다. 김동화 선생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불교’는 ‘철학’과 ‘종교’라고 하는 새로운 범주 그리고 “객관적인 철학적 진리”의 강조를 통해 생활세계로부터 점차 유리되어 갔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급속도로 서구화되고 불교연구와 교육이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이 문제는 방치되거나 악화 되어왔다. 특히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불교연구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예를 들어 한 철학 교수는 「원효 철학의 현대적 조명」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논의는 철두철미 철학적이고자 하기 때문에 연기론을 취급할 수 없었고, 따라서 자유 상실과 자유 회복과정을 발생적, 인과적으로 규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의 문제이며 수도의 문제로서, 철학적 분석, 해명의 한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원효의 경우 그가 사용하고 있는 술어들이 형이상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철두철미 철학적이며 따라서 철학적 접근만이 원효의 불교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 단언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 교수가 ‘조명’하고자 하는 원효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해명하고자 하는 ‘불교’가 어떤 불교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철학자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불교일 것이다. 

철학과 종교라는 이름이 가져다준 불교에 대한 폐해는 전방위적이다. “저는 불교를 ‘철학적으로’ 공부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믿지 않습니다”, “불교를 믿지만 불교 철학은 잘 모른다” 등의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회자되고 있다. 물론 불교인만이 불교연구를 할 수 있다든가, 비불교인의 불교연구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근대 이후 불교가 종교와 철학으로 나누어지게 되면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별개의 것이 되고, 그 결과 삶으로부터 분리되어버린 불교의 현재 모습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과 종교는 원래부터 서로 다른 범주인가, 철학이 삶으로부터 분리되고 순전히 이론 활동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왜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등등의 의문이 생긴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아도(Pierre Hadot, 1922~2010)는 명저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적 담론은 생의 선택, 실존적 선택으로부터 기원하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이래 고대 철학에서 ‘철학’이란 삶의 방식에 관한 것, 삶의 기술이자 실천의 문제였다. 

소위 철학적 담론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철학은 삶의 방식이며 그것에서 나오는 담론은 그 생활양식을 이해하는 수단이자 표현일 뿐이라는 의미다.
아도의 설명에 따르면 철학이 삶으로부터 분리되고 순전히 이론 활동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중세부터다. 기독교가 ‘유일한 철학’으로 정의되고 삶의 실천 영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그 외 나머지 ‘철학들’은 ‘유일 철학’을 설명하는 보조수단으로 전락한다. 실천이 빠져버린 담론은 신학 논쟁에나 사용될 수 있는 단순한 개념 자료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려워졌다. 

18세기 근대 계몽시대 데카르트나 칸트 저작에서 우리는 여전히 ‘삶의 기술로서 철학’이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유효함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이성(理性)의 기술자’로 일컬어지는 강단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철학의 중심이 옮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후 서양 근대에서 철학은 순수한 사변, 지식의 체계화, 논리적 완성을 목표로 삼는 이성 기술자들의 활동이 되어버렸다. 19세기 말 동양의 지식인들이 맞이해야 했던 서양의 ‘철학’이란 삶에서 분리되고, 실천을 빠뜨린, 사변적 이론 활동으로서의 철학이었다.

종교와 철학은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다양한 정신 활동이란 측면에서 종교와 철학은 구분될 수 있지만, 삶의 문제를 놓고 본다면 분리될 수 없다. 

이제 철학은 ‘유일 철학’의 등장으로 빼앗겼던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 그 실천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종교는 맹목적 믿음을 넘어 이해와 깨달음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종교와 철학은 ‘삶’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불교의 경우 이것은 ‘철학적 불교’와 ‘종교적 불교’로 분리된 오늘의 불교를 붓다의 본래 가르침으로 되돌려서 온전한 ‘하나’의 불교로 복원하는 일이 될 것이다.

 

불교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 나의 경우

그렇다면 불교는 우리에게* 어떤 삶의 기술, 삶을 위한 지혜를 줄 수 있을까? 

* ‘우리에게’라는 말은 부담스럽다. 필자 안목의 부족함은 물론 이려니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흠결을 가진 사람이 ‘우리’를 향해 삶의 기술이니 지혜니 말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주저하던 끝에 소제목에 ‘나의 경우’라는 말을 덧붙였다. 필자가 삶의 지혜, 인생의 북극성으로 삼고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고백한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이것을 지금까지 필자가 잘 실천하고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때로 실패하면서도 나름대로 부단히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불교가 삶의 기술, 나아가 삶의 지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를 자기 인생의 북극성(North Star)으로 삼는 결단이 필요하다. 북극성이란 길을 잃지 않고 바른길을 찾아가게 해주는 길잡이, 기준 그리고 목표를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돈’, ‘출세’ 등과 같은 세속적 욕망을 자신의 북극성으로 삼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욕망 실현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종교는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기심, 무한 경쟁, 거짓말, 사기 등 온갖 개인적·사회적 병폐들은 그릇된 목표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목표가 바르지 않으면 어떠한 수단도 바르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표가 바르면 자연스럽게 수단도 바르게 된다. 

불교가 제공하는 중요한 삶의 지혜 중 하나는 ‘인생은 곧 수행’이라는 사실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인간이란 바로 ‘호모 메디타티오(homo meditatio)’, 즉 ‘수행하는 인간’이다. 수행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며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다. 인간의 무한한 향상과 퇴보는 하늘의 뜻이나 사제(司祭)들을 통한 제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위에 달렸다. 수행은 내면의 도덕적 가치로서 마음을 건강하게 가꾸는 일이다. 

근대 이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발달로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 바로 ‘인생은 수행’이라는 사실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유전과 환경에서 비롯되는 결정론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의학과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물질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알게 모르게 근대 이후 마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많이 바꿔 놓았다. 마음은 우리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마음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단련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결국 마음의 변화 가능성과 그 구체적 방법을 설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불교란 사찰, 예불, 출가승단 등과 같은 의례와 제도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삶과 가르침의 주체를 샤키야무니 붓다 한 분으로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경전에서 붓다의 원음(原音)을 가려낸다거나 ‘본래의 가르침’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여러 문헌학적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이해라고 할 수 없다. 불설(佛說)을 특정 가르침이나 경전으로 실체화, 고정화하지 않고 다양한 전통 속에 녹아 있는 어떤 ‘χ’라고 이해하는 게 연기적인, 불교적 역사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500년 불교사는 붓다의 ‘본래 가르침’, ‘χ’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실천의 역사였다. 그 ‘χ’는 때로는 스리랑카 상좌부의 형태로 드러나고 때로는 대승의 보살도로 실천되었으며 또 때로는 선불교의 깨달음으로 구현되기도 했다. 불교사는 불변수연(不變隨緣)의 역사다. 지금 불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고 있을까. 니체의 명구가 떠오른다. 

“모든 학파와 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정당한 소유물이다. 우리가 전에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적 해결책을 통해 유익을 구했다고 해서 스토아학파의 해결책을 차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으며, U.C 버클리에서 「인도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주립대 비교종교학과 조교수, 계간 「불교평론」 주간,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인문학 단장 등을 역임했다. 2004년 불이상(학술 부문), 2011년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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