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 선禪· 자연· 마음 그 만남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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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선禪· 자연· 마음 그 만남의 미학
  • 최원석
  • 승인 2021.03.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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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와 불교
봉암사는 “하늘이 준 땅이니 승려의 거처가 되지 못한다면 도적의 소굴이 된다”는 곳에 터를 잡고 희양산에 안겨 개산했다. 백두대간의 단전 부분에 위치한 희양산은 산중턱부터 화강암 바위들로 이뤄져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처럼 보인다. 

새 시대 이끄는 사상이었던 비보

고려 시대에 풍수와 불교는 서로 결합해서 사회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풍수의 지력사상(地力思想)과 불교의 불력신앙(佛力信仰)이 결합했다. 조선 시대에는 풍수와 불교 요소가 결합한 설화가 많았다. 서로 긴밀하게 만난 풍수와 불교는 한국 사회에 독특한 사상과 문화, 경관을 형성했다.

풍수와 불교의 만남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고,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한국에서 전개된 풍수와 불교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신라 하대의 성립기다. 이때는 중국에서 선종이 들어오면서 풍수와 불교가 본격적으로 교섭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속성이 전연 다른 두 사상인 풍수와 불교가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서로 경합하다 나중에는 협조적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통해 불교는 풍수의 확산에 이바지했고, 풍수는 사찰입지와 사찰 택지법에 영향을 주었다. 선종이 풍수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산천의 허실을 보완하기 위해 비보사상이 정립됐고 그 결과물로 비보설(비보사탑설)이 형성됐다. 비보사상은 나말여초의 사회 전환기에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사상적 추진력으로 기능했다.

둘째, 고려 시대의 흥성기다. 사회지배층에서 강력한 공간 사상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비보사상을 국가의 정치 주도 세력이 정책적으로 적극 활용한 시기다. 당시의 두 주류 문화인 풍수와 불교는 제도권 안에서 지배적 지위를 획득하고 서로 공고하게 결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려 조정은 비보설을 국토 공간의 통합 운용원리로 삼고 수도와 지방 곳곳에 비보사찰을 설치해 관리했다. 그리고 풍수와 불교를 결합한 국가적 의례로서 지리연기비보(地理延基裨補, 왕업을 연장하는 비보법)를 실행했다.

셋째, 조선 시대의 쇠퇴기다.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불교는 억압받고, 도선의 비보설 역시 유교 이념에 견제됐다. 기존의 비보사찰은 대폭 축소되거나 기능을 대부분 상실했다. 

많은 사찰이 존립 위기에 몰렸고, 지방 사찰 일부가 근근이 사세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유교 이념이 강고하게 지배한 조선 사회에서 풍수와 불교는 급격히 쇠락했지만, 동네마다 지관이 있을 정도로 민간신앙으로 전개됐다. 그 과정에서 도선, 의상 등 유명한 스님의 이름을 빌린 풍수도참서와 비결서, 민간설화 등이 만들어졌다. 

 

지방호족에게 매력 어필한 선종과 풍수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한 이래 왕족이나 귀족층을 중심으로 풍수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왕실이나 국도 중심의 지배세력에 국한되기는 했으나 불교 흥성에 비례해 풍수설도 어느 정도 유포됐다. 신라에서 불교가 주로 지배세력과 밀착돼 경주 중심으로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풍수설도 왕궁이나 왕릉, 지배세력과 연결된 사찰터 선정 등 국도 경주를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중앙지배층에서는 사찰터의 왕릉지 이용을 둘러싸고 풍수와 불교가 경합하는 모습도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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