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크리트로 배우는 불교] 금강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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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로 배우는 불교] 금강경(3)
  • 전순환
  • 승인 2020.11.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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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에 관한 이야기 上

우리나라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간주하는 한역본 『금강경』을 일반 및 전문 사전이나 서적들에서 검색해보면 공통적으로 공(空) 사상,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 무-집착의 보살행 등과 같은 용어나 개념들이 이 경전을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은 한역본이든 범본이든 이러한 표현들이 직간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반야바라밀다’라는 용어를 부각해 언급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산스크리트로 쓰인 『금강경』의 모든 사본을 대조하면서 번역하고 그 내용 전체를 파악해 본 결과, 필자가 생각하는 핵심 개념은 경명을 번역한 ‘금강과도 같은〔법〕을 끊어내는 반야바라밀다’이고, 주된 키워드는 ‘법(dharma)’과 ‘끊어냄’(uccheda)‘ 그리고 ‘반야바라밀다(prajñāpāramitā)’이다. 

 

| 금강경의 화두 

이 세 개의 용어로 요약되는 『금강경』의 화두를 크게 두 가지의 질문으로 파악해 보려 한다. 하나는 “법을 끊어낸다는 반야바라밀다는 과연 무엇이고, 어떠한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이고, 다른 하나는 “반야바라밀다에 이르기 위해 법은 어떠한 방식으로 끊어야 하는 것일까?”이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금강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아가는 경우,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심오한 불교 용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내용의 전개 방식이 조리 있게 짜여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위와 같은 두 개의 질문들로 『금강경』을 이해해 보려 한다. 첫 질문에 관한 내용은 이번 호에서 이야기하고, 두 번째 질문은 다음 호에 소개하기로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세존  범본 『금강경』에서 prajñāpāramitā는 5회 이하로 등장하며, ‘법-문(法門)’을 뜻하는 dharma=paryāya로 표현되기도 한다. 월간 「불광」 550호에서 소개한 뮬러 계열의 범본들에서 경배 문구가 ‘세존과도 같은 반야바라밀다에게 경배’인 점을 고려할 때, 반야바라밀다는 곧 세존이라는 공식이 나온다. 반야바라밀다를 수식하는 bhagavat-ī-는 보통 그 어원적 의미에 따라 ‘복덕구족(福德具足)-한’으로 번역하지만, 사실 bhagavat란 산스크리트 명사의 경우 반야부에 속하는 경전들 전체를 둘러보아도 ‘세존’ 외의 다른 쓰임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명사에서 파생한 문제의 형용사는 ‘세존과도 같은’으로 번역해야 하고, ‘반야바라밀다는 곧 세존’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여래  그리고 이 경전의 17장에서도 여래(tathāgata)가,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경명의 의미와 같이 dharma=uccheda, 즉 ‘법과의 단절’을 나타낸다는 세존의 말씀이 나타나기 때문에, 여래 또한 반야바라밀다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장에서 “수보리야, 만약 여래에 의해 완전하게 깨달아진 그 어떤 법이 실재했다면, 연등불 여래는 나를 ‘젊은이여, 당신은 장차 석가모니라 불리는, 공양을 받을만하고 올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 여래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지 않았을 것이니라”라는 세존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세존은 곧 여래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지난 536호에서 필자가 규정한 반야바라밀다의 의미는 ‘극도의 진여지’라고 밝힌 바 있는데, 본 장에서 여래가 Bhūta=tathatā, 즉 ‘진실한-진여(眞如)’라고 언급되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종합해 보면 “반야바라밀다는 세존이자 여래이다”라는 정의가 가능하다. 필자가 굳이 이와 같은 공식에 초점을 두려는 이유가 있다. 『금강경』이 반야바라밀다가 과연 무엇인지, 어떠한 것을 나타내는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세존이나 여래와 관련된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전 내에서 이러한 관련 내용이 등장하는 장면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위  그 가운데 하나가 7장에서 무위(無爲)란 표현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세존께서 여래가 터득한 그 어떤 법이 실재하거나 가르쳤다고 하는 그 어떤 법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수보리 장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01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02 여래에 의해 터득된 소위 무상의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법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03 여래에 의해 가르쳐진 그 어떤 법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04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래에 의해 터득되었다거나 가르쳐졌다는 법은 05 〔실재하지 않기에〕 파악되지도 말로 표현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법은 〔실재하지 않기에〕 법도 비법도 아닌 것입니다. 06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래와 같은〕 성인(聖人)들은 무위적으로 존재해 온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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