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신화] 빡빡머리 사문의 고행은 무의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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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신화] 빡빡머리 사문의 고행은 무의미한가?
  • 동명 스님
  • 승인 2020.09.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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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소장 붓다의 고행상.

 

| 고행(苦行)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선방에 거의 공통으로 걸려 있는 그림은 붓다의 고행상(苦行像)이다. 붓다는 쾌락도 버리고 고행도 버린 중도(中道)의 길을 가라고 말했건만, 왜 우리나라 선방에선 고행상을 모셔놓은 것일까? 

몸을 일부러 지속해서 고통스럽게 만드는 수행을 고행이라 한다. 인도의 전통사상 속에서 고행(tapas)은 신(神, Deva)을 만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에서 악마 라바나(Rāvana)는 1만 년의 극심한 고행을 통해 창조의 신 브라흐마(Brāhma)의 은총을 받아 죽지 않는 힘을 갖는다. 히란야크샤(Hiranyakṣa)라는 악마도 고행을 통해 그가 열거하는 어떤 유정(有情)에게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 은총을 입는다. 발리(Bāli) 또한 엄격한 고행을 함으로써 신으로부터 전 세계를 지배할 힘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모두 유지의 신 비쉬누의 화신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영웅 아르주나(Arjuna)는 극심한 고행을 통해 쉬바 신에게 어마어마한 파괴력의 무기를 받고 그 무기로 맹활약을 펼친다. 이 이야기들은 고행이 인도 신화 속에서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를 말해주지만, 엄밀히 말해 고행은 고행자 스스로 자신의 힘을 기르는 수단이 아니다. 극심한 고행을 하다 보면 신이 이를 보고 응답하게 되고, 결국 신의 은총으로 고행의 대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행은 자력(自力) 수행이 아니라 타력(他力) 수행이다.

자력으로 붓다가 되기 위해 수행하고 있는 싯다르타에게 고행은 어울리지 않았다. 고행림(苦行林)에서 고행자 박가와를 만났지만 바로 고행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선정수행을 통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싯다르타는 막막했다. 세간에 소문이 자자한 수행자들의 면모를 샅샅이 살펴보아도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 이상의 수행자는 없었다. 

싯다르타는 라자가하를 떠나 걷고 또 걸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가야 땅 우루웰라 지역에 다다랐다. 그때 싯다르타는 물속에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비유가 떠올랐다.

첫째, 물속에 있는 화목에는 불을 지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속에 발을 담근 채로 수행에 성공하기 힘들다. 둘째, 물속에 있던 화목을 꺼내었다 해도 마르지 않은 상태라면 불을 지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세속을 떠났다 해도 애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수행에 성공할 수 없다. 셋째, 물에 빠졌던 화목이라 해도 마른 땅으로 끄집어내어 잘 말린다면 불을 지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애욕을 완전하게 버린 수행자는 수행에 성공할 수 있다(『맛지마 니까야』 「큰 삿짜까 경」).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싯다르타는 마가다국의 여러 마을을 지나 우루웰라의 세나니 마을 숲속으로 들어섰다.

 

| 초인적인 고행에 돌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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