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추노’의 용골대, ‘대한민국 정치비사’의 전두환 대통령, 영화 ‘소수의견’ 차장검사 등 지적인 역할부터 악질 캐릭터까지 다양한 배역을 넘나들며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대중을 사로잡은 배우 윤동환. 그는 연기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독립영화 <개아빠(Dogpa)>를 제작·연출하고, 세계적인 명상가이자 사상가인 크리슈나무르티의 책 『앞으로의 삶(Life Ahead)』을 번역, 불교의 사성제 이론에 빗대어 영화와 인생을 이야기하는 『윤동환의 다르게 영화보기』를 집필했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작년 한 유튜브 채널에서는 절에 머물며 요가와 명상을 하는 그의 소식을 전했다. 영상 속 그는 과거 화려했던 배우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소박한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배우에겐 생명과도 같은 목소리마저 많이 쉬어있었다. 370만 건이라는 놀라운 조회수를 기록한 그 영상이 화제가 된 지 1년이 지났다. 서울 도심 속 사찰에서 요가와 명상을 지도하는 그를 다시 찾았다.
사진. 유동영
| 미소가 피는 연화사의 아침
대웅전 안 10여 명의 사람들이 윤동환 배우의 지도에 맞춰 요가 동작을 이어나갔다. 그가 지난 5월부터 매주 일요일 서울 연화사에서 진행하는 ‘연화사의 아침’이라는 요가·명상 수업 풍경이다. 40분 정도 요가로 몸을 푼 뒤 명상 시간이 이어졌다. 그가 눈을 감고 파드마사나(padmasana, 연꽃자세)로 앉아 사람들을 명상으로 안내했다.
“명상으로 들어갑니다. 호흡 관찰하시고 몸의 감각, 감정, 생각이 공(空)함을 직관합니다.”
이따금 그의 호흡에서 쇳소리가 섞여 나왔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에너지가 넘쳤다. 명상이 끝나갈 때쯤 그가 축복과 염원을 담은 기도문을 외웠다. 사람들은 한 문장씩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매일 매일 점점 좋아집니다. 점점 건강해지고 지혜로워집니다. 보살님들께 기도합니다. 우리 인간이 합당하다면, 축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소서. 당신 뜻대로 하소서.”
마지막 말을 한 뒤 그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번졌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을 양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은 모습이 묘하게 그의 뒤 불상과 닮았다.
| 내 안의 부처, 크리스천 부디스트의 화두
“어려서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았어요. 초등학교가 미션스쿨이었는데 그때 영향으로 대학 초반까지 기독교에 심취해있었죠.”
수업이 끝난 뒤 이어진 인터뷰 자리에서 그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명상 시간에 했던 축복의 말이 기독교 기도문 형식과 유사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과거 한 방송에서 자신을 ‘크리스천 부디스트’라고 소개했다. 종교가 무어냐고 물었다.
“제가 스타일이 좀 다양해요(웃음). 어렸을 때부터 깨달음의 욕구가 있어서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를 항상 질문했어요. 인문학 공부, 예술 활동, 여행 등을 하며 계속 답을 찾았어요. 그러다가 군대에서 라즈니쉬와 크리슈나무르티 책을 접했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불교에까지 관심이 확장됐죠. 우스갯소리로 ‘기불교’라고 말하곤 했는데 지금의 저는 불교와 더 가까워요.”
1992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 서울대 출신 엘리트 배우로 주목받았고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주연, 조연으로 활약하며 인기를 얻었다. 그런 그가 대중에게 잊혀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블랙리스트에 올라 캐스팅에서 점점 배제됐어요. 4대강 개발 반대 발언, 쇠고기 파동 집회 지지 발언, 한예종 사태 소신 발언을 했던 게 문제 된 거 같아요. 그러던 중 2015년에 목이 갑자기 안 좋아졌어요. 스트레스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쳤던 것 같아요.”
그는 배우에겐 사형선고와도 같은 목소리 이상을 오히려 깨달음에 전념하는 좋은 계기로 여겼다. 당장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고 이후 태국과 인도로 가서 요가와 명상 수련에 참가했다.
“태국 사원에서 생활하면서 하루 종일 요가와 명상에 집중했어요. 몇 시간씩 가만히 앉아있는 게 처음엔 어려웠지만 일주일, 열흘 반복하다보니 정신이 맑아지면서 지금껏 체험해보지 못 한 고요 상태가 찾아왔어요. 삼매(三昧) 상태였죠. 그때 느낀 상쾌함의 기쁨은 이 세상 것이 아니었어요.”
몰입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속적인 수련을 위해 요가와 명상 수련회를 찾아다녔다. 숭산 스님의 제자, 청안 스님이 있는 헝가리 절에서도 한 달간 머무르며 화두를 붙잡고 씨름했다.
“선사들의 어록을 보면 ‘내가 곧 부처이니 깨달음을 밖이 아닌 내 안에서 구하라’라는 말이 반복돼요. 에크하르트 톨레도 ‘자유로워지는 것이 언제 가능할까요?’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미 자유롭다’고 답해요. 성경에는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며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라는 구절이 나와요. 표현만 약간씩 다를 뿐이지 ‘이미 우리는 자유롭고 완전하다’라는 식의 얘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말이 제겐 화두가 됐죠.”
| 화가 날 땐 루돌프!
그에게 명상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에서 화가 날 때도 화에 ‘루돌프’라는 이름을 붙여서 ‘지금 나는 루돌프가 나는구나 루돌프 루돌프’라고 되풀이한다. 그렇게 하면 화를 바로 표현하지 않고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분노는 내가 아니에요. 나에게 일어난 생각, 감정일 뿐이죠. 저는 그게 근본 무명, 탐진치, 고통체, 즉 ‘정신의 기생충’이라고 봤어요. 우리의 생각에 개입해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믿게 만들죠. 그것들은 삿된 생각일 뿐이라는 걸 자각해야 해요. 자신의 생각인 양 붙들거나 더 나아가 진리로 믿어버리게 되면 탐진치의 먹잇감이 되어 버려요. 자신 안에 참 진리가 있다고 믿고 의심, 탐욕, 분노 등을 주시하며 객관화하는 명상을 하면 그것에서 점점 자유로워져요. 그게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이죠.”
그는 참나를 만나는 요가·명상법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이를 위해 ‘플라시보 요가·명상’이라는 자신만의 수업도 만들었다. 자기 암시만으로도 치유가 된다는 미국 신경 의학자 조 디스펜자의 플라시보(Placebo) 개념을 따왔다.
“요가학원에서는 아사나(Asana, 자세)와 프라나야마(Pranayama, 호흡법)만 하고 명상은 잘 안 해요. 절에서는 명상은 많이 하는데 요가는 적게 하죠. 제 수업은 요가 40%, 명상 60% 비중을 둬요. 특이한 건 요가를 한 뒤 명상 시간에 자기 암시와 참회, 축복을 한다는 거예요. 1시간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거죠.”
육바라밀 중 보시만 해도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이 인생 목표라고 강조한다. 최근에는 명상과 깨달음을 주제로 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요가, 명상, 유튜브 모두 법보시의 일환이라고. 앞으로 뭐든 보시하며 자신도 깨달음으로 가고, 남들도 깨달음으로 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요가의 목적은 최종 단계인 사마디(Sanadhi)로 가는 거예요. 사마디는 삼매와도 같아요. 고요함, 침묵, 깊게 들어가 참나를 만나는 체험 같은 거죠. 요가를 통해서 불교 팔정도의 마지막 정정(正定)으로 갈 수 있어요. ‘래디컬(radical, 급진적)’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제 수업에서 사마디를 맛봤으면 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