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조각, 이 순간 나와 공명하는 사물들
상태바
[상상붓다] 조각, 이 순간 나와 공명하는 사물들
  • 마인드디자인(김해다)
  • 승인 2020.07.23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정서영 <공기를 두드려서 Knocking Air> 展에 대한 단상

정서영의 조각은 유리창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이슬 같다. 차 안의 따뜻한 공기와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유리창이라는 표면에서 수분이라는 재료로 맞닥뜨렸을 때 생기는 이슬. 곧이어 사라지거나 조건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탈바꿈하기도 하는 공기 중의 결정체. 이슬을 대수롭지 않게 ‘보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이슬을 ‘해석하려는’ 사람은 없다. 보거나, 보지 않거나. 이슬을 대하는 우리에게는 단 두 가지의 선택지가 존재할 뿐이다.

| 때론 모르는 게 약이다

아, 차가 참 맛이 좋다! 다음 순간, 패키지를 살펴본다. 브랜드도 산지도 가격도 살펴본다. 포털사이트에 검색도 한 번 해본다. 유명한 차일까? 어떤 종류의 차일까?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는 차일까? 슬슬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뭔가 거대하고 심오한 차의 세계에 갓 발을 들여놓은 입문자가 되어, 차에 관한 지식 1부터 100까지를 모두 파악해야만 이 차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예술을 난해하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눈앞에 놓인 이 작품이라 불리는 사물의 이면에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지식과 계보와 의미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부담감 말이다. 물론 한 사물이 ‘예술’로 불리기까지 거쳐온 지난한 역사적 순간들이나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완전히 잊기란 어렵다. 그러나 내가 마시는 차의 정보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차 맛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내 혀가 느끼는 맛에, 내 코끝에 와 닿는 향기에 조금 더 집중해보기를, 정서영은 ‘조각적으로’ 제안한다.

 

| 난해한 예술 앞에서 쫄지 않는 법

<테이블 A>를 보자. ‘이건 또 무슨 난해한 예술인고!’ 싶어 머리가 지끈거리는가? 그래도 괜찮다. 테이블 형태를 이루고 있는 이 ‘예술’을 읽으려 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해보자. 명상하는 중이라 생각하면 좋다. 호흡을 관하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가만히 지켜보듯, 눈앞의 ‘예술’을 그저 관찰해보는 것이다.

커피 테이블에 쓰이곤 하는 커다란 원형 유리를 작은 스툴 의자 두 개와 나뭇조각이 받치고 있다. 나뭇조각 위에 또 다른 작은 나뭇조각들을 올려놓아 의자 두 개와 높이를 맞춘 모양이다. 유리판 위에는 세 종류의 또 다른 조각들이 놓여 있다. 고속도로 모양의 조각, 손가락이 꺾인 모양처럼 보이는 하얀 조각, 주먹 쥔 손 같아 보이는 검정 조각. 궁금해진다. ‘이 모양들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걸까? 고속도로와 주먹의 관계는 뭘까?’ 명상 수련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려본다. ‘해석하려 하지 말고, 관계 지으려 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라.’ 내 눈앞에는 지금 정서영이라는 사람과 (아마도) 그의 조수들의 힘으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바라캇 컨템포러리’라는 미술 전시장에 옮겨진 사물들이 있다. 무수한 인연들 - 작가 본인의 결심 (그리고 그 결심을 가능하게 했던 작가를 둘러싼 수많은 사건), 사물들의 역사 (의자와 유리판 등 사물들이 거쳐온 생산과 유통 과정들을 포함한), 미술 전시장이라는 공간의 역사 (한국의 미술 중심지와 다름없는 삼청동이라는 지역성을 비롯해 건축에서 미술을 따로 떼어내어 미술을 감상용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순수 미술’의 탄생사, 그리고 ‘순수 미술’의 개념을 수입하여 응용·발전해온 한국미술의 역사를 포괄한) 등 - 의 화합으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사물들은 바로 이 모양으로 나라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 그뿐이다. 작품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 독해 불가능한 사물들 앞에서 쫄지 않을 수 있다. 이면에 숨겨진 ‘나만 모르는 상징과 비밀들’을 캐내려 하지 않을 때만, 논리정연하게 분석해서 ‘알려고’ 하지 않을 때만, 이 사물들은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평소에도 매 순간 ‘하필이면’ 자신이 그 장면을, 사람을, 사물을 보고, 거기에 있다는 특별한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고. 그런 마음으로 <우주, 코>를 보면 좋겠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