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무본당(務本堂) 아카데미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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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무본당(務本堂) 아카데미 열다
  • 강우방
  • 승인 2020.06.2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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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본당 현판. 중국 서당에 걸었던 현판, 19세기.

알렉산더대왕의 최측근 프톨레미 1세가 기원전 4세기에 지은 세계 최대 규모였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나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나 하버드대 와이드너 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는, 문자언어로 쓰여진 책들에는 여래의 본질을 말하는 문구는 한 줄도 없다. 그러나 지구를 장엄하는 모든 건축과 조각과 회화에서 조형언어로 쓰여진 조형 예술 작품들을 찾았다. 그리고 여래의 본질을 웅변하는 침묵의 언어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본당(務本堂) 아카데미를 열었다.

 

| 홀로서기라는 운명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게 놀라거나 가슴 벅차게 환희작약(歡喜雀躍)한 적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일이 있는지 물어보면 모두가 있다고 말하기는 한다. 어떤 체험인지 물으면 거의 하찮은 일들이다. “로또가 당첨되면 누구나 놀라겠지요.” “베토벤 제9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 가슴 벅차겠지요.” 그런 것은 환희작약에 해당하지 않는다. 어떤 큰 장애물을 스스로 힘으로 극복했을 때 환희작약한다.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하고 나면 그때 감격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에베레스트산만큼 거대한 정신적인 장벽을 극복하면 어떨까? 그것은 육체적인 등정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기쁨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에베레스트산은 아무리 높아도 등정을 마치면 다시 내려와야 한다. 정신적인 장벽에는 하산이 없다.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없어서 내려오는 법이 없는데 그것은 살아있는 한, 인식의 과정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식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문제는 달라진다. 만일 그런 놀라움이나 환희작약한 적이 없다면 당신의 삶은 항상 같은 상태에서 머물고 있다는 증거이자, 단지 알음알이에서 만족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알음알이를 크게 경계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력신앙(自力信仰)의 철학이고 신앙이다. 신앙은 확신이다. 만일 『화엄경』을 읽으려면 어느 고승이 그 경전을 주석한 매우 두툼한 책을 사서 읽기 마련이다. 화엄경을 참으로 이해하고 싶으면 주석이 없는 경전만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서 자력으로 해독해야 한다. 어느 고승이 주석한 책을 읽으면 그 고승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지 경전의 말씀은 터득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타력을 빌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자력으로 터득하면 그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과 환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경전을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경전에 나오는 ‘법계(法界, 우주 만법의 본체인 진여)’라든가 ‘인드라망(因陀羅網, 세상을 덮고 있는 한 없이 넓은 그물)’ 그리고 ‘우보(雨寶, 비처럼 쏟아지는 중생을 이익케 하는 보배로운 가르침)’라든가, 그리고 ‘선재동자가 관음을 찾아가서 절대적 진리를 묻는 장면’ 등을 스스로 익혀서 생활이나 학문이나 창작활동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아마도 싯다르타 태자는 정각을 성취했을 때 가장 크게 환희작약했을지도 모른다.

불상에서 ‘석가여래 삼존불’이라 하면, 석가여래의 양옆에 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도상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래는 대장부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협시보살은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화려한 모자[寶冠]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寶髮]이나 목걸이나 팔찌, 그리고 화려한 옷들을 보고 아직 세속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싯다르타 태자는 왕궁의 담을 넘어 숲에 이르러 모든 화려한 옷이나 장식을 벗어서 마부인 찬타카에게 넘겨준다. 불화와 불상에 나타나는 보살을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것은, 출가 전의 세속적인 모습이라고 대부분 스님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와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보관이나 몸에 두른 여러 가지 장식은 단지 그런 장식이 아니다. 그래서 아직도 여래와 보살을 구별하지 못한다. 다른 점을 설명해 보라면 올바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석가모니의 양쪽에 서 있는 보살의 얼굴을 보면 양미간의 백호나,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으므로 여성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수염이 아니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양어깨를 타고 내려와 허리까지 이르므로 연구자들도 혼란에 빠진다. 경전에 보살을 두고 ‘착한 남자야’라고 부르고 있는데도 여성으로 알고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이 글에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큰 주제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제1영기싹’과 관련이 있다. 앞으로 ‘제1영기싹’은 만물생성의 근원임을 더 설명하게 될 것이다. ‘제1영기싹’은 1만 점 이상의 작품을 필자가 개발한 ‘채색 분석법’이라는 조형 해독법으로 얻은 결론이므로 설명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 진리는 세계 최초로 발견하여 지금까지 연구를 해오고 있으므로 2007년 이후에 출판된 저서들을 정독해 주시기 바란다. 

여래의 양 협시는 사람이 아니고 여래가 지닌 가장 큰 덕목인 ‘지혜’와 ‘실천’을 의인화(擬人化)한 것이다. 지혜는 배워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실천도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얻으면 스스로 실천하기 마련이니 지혜와 실천은 불이의 세계에서 하나가 된다. 싯다르타 태자가 정각을 성취한 후 얻은 지혜를 철저히 실천하며 진리를 보여 주는 것이 ‘석가여래 삼존불’의 참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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