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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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러하다
  • 원제 스님
  • 승인 2020.03.3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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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불교 생활

세계 일주를 시작할 적에 그 시작점으로 삼은 곳이 바로 티베트의 카일라스산입니다. 많은 불교인들이 이 카일라스산을 우주 중심에 있는 수미산의 현현(顯現)으로 믿고 있습니다. 수미산 제일 꼭대기에는 제석천왕이, 그 중턱에는 사천왕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카일라스는 영혼의 성소나 신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성스러움의 이유 때문인지 카일라스는 여태껏 공식적으로 그 어떤 인간에게도 등반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이 카일라스 정상에 오른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바로 밀라레빠입니다. 

설화에 따르면 티베트 불교의 고승인 밀라레빠가 토속 종교인 뵌교의 성자와 서로 신통력을 겨루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나 봅니다. 결국엔 카일라스 정상까지 제일 먼저 올라가는 사람이 승자라고 정하고 마지막 내기를 하였습니다. 이에 뵌교의 성자는 북을 타고 하늘을 날아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상에 거의 다다를 찰나, 밀라레빠가 순식간에 햇빛을 타고 카일라스의 정상에 도달했습니다. 승자는 밀라레빠였습니다. 

전설이 지니는 상징성을 실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아마도 당시에 불교와 뵌교 사이의 알력 관계나 우열 관계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불교가 더욱 우수한 종교임을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 현재 티베트의 주요 종교는 뵌교가 아니라 불교라는 사실이 이러한 해석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뵌교와 불교 사이의 결과적인 승패나 우열을 떠나서 이 전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적인 요소들도 제법 해석해볼 만한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뵌교의 성자는 몸을 존재의 근거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카일라스를 대상이나 목표로 대했으며, 그 대상과 목표로 삼은 카일라스에 도달하기 위해 북이라는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보통의 경우 북은 치는 용도일 테지만, 성자는 북을 타고 하늘을 나는 용도로 바꾸는 신통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뵌교의 성자는 사람을 이기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저는 이를 욕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밀라레빠는 달랐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저는 밀라레빠가 실제 육신을 이끌고 카일라스의 정상에 도달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만일 몸을 이끌고 산 정상에 도달했다면 뵌교의 성자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산 정상에 도달한 것은 밀라레빠가 아닙니다. 그건 빛입니다. 도달하려는 마음을 내기 전에도 이미 도달한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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