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에세이] 최고의 지우개는 참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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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 에세이] 최고의 지우개는 참회이다
  • 김택근
  • 승인 2020.03.3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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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지식인들에게 물었다. “지난 2000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무엇일까?” 대답은 저마다 달랐다. 비행기, 양자 이론, 컴퓨터, 인도·아랍의 숫자 체계, 시계, 피임약, 대학, 기독교와 이슬람교, 거울, 미적분, 깃발, 교향악단, 아스피린…. 열거해 놓고 보니 인류는 숨 가쁘게 뭔가를 만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하나하나가 인간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런데 미국의 작가이며 평론가인 더글러스 러쉬코프는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바로 지우개였다.  

“컴퓨터의 ‘del’키, 화이트, 헌법 수정조항, 그 밖에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는 모든 것을 꼽고 싶다. 이렇게 뒤로 돌아가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면 과학적 모델도 없었을 것이고 정부, 문화, 도덕도 없었을 것이다. 지우개는 우리의 참회소이자, 용서하는 자이며,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선정 이유가 제법 새길만 하다. 사는 것은 따지고 보면 늘 무엇인가를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지우개는 세월일 수도 있다. 과거에 매여 있었다면 인류는 앞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지운다는 것은 다시 시작함이다. 지울 수 있음에는 다시 시작할 힘이 있음이다.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지우려 하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평생을 따라다니며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정말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것은 세월의 빗질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불쑥불쑥 튀어나와 아프게 찌른다. 사람들은 그런 기억 몇 개쯤은 마음 또는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기를 바란다. 선승처럼 공부해서 무슨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고통과 회한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한다. 집착과 아만을 끊어버리고 평안함이 찾아들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기억은 아플수록 마음에 깊숙이 박혀있어서 지난 일을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불안하고 불쑥불쑥 화가 치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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