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학문의 대전환, 세계 미술사 정립을 위한 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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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학문의 대전환, 세계 미술사 정립을 위한 서장
  • 강우방
  • 승인 2020.02.1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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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큰 위기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 미래를 감지하지 못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중앙청은 원래 조선총독부 였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청사였고, 1986 년부터 1995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한국문화 창달의 중심이자 기구한 역사를 지닌, 동양에 존재하는 르네상스식 건축 양식의 기념비적 건축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당시, 학예연구 실장이었던 나는 철거를 적극 지지하던 관장과 자주 다투었다. 철거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 소중한 한 나라의 문화유산을 옮겨놓을 장소도 미리 마련해 놓지 않은 상황에 반대했을 뿐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문화에 무지막지한 사람이어서 문화유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대통령의 명령에 문화부 장관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어떤 장관은 나에게 전화하여 도와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 구석 마구간 자리에 급히 건물을 지었는 데,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건물이다.

그러다 갑자기 용산에 새롭게 국립중앙박 물관을 세울 계획이 수립됐고, 대규모 박물관 설 계를 위한 국제 공모가 열렸다. 나는 공모 결과에 크게 분노했다. 모집된 설계도 가운데 가장 형편없는 것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유명한 건축가들의 설계도가 쇄도했고, 국내 건축가들 중에도 심혈을 기울여 제안한 것이 많았음에도 전부 마다하고 고른 것이 그것이라니! 설계도를 조금 읽을 줄 아는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탄했 다. 공모 (公募) 전이란 것이 겉으로는 공정의 깃발을 드높이 휘날리지만, 실제로는 밀실에서 정부와 심사위원들이 공모 (共謀) 하는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소리 높여 정양모 관장과 싸웠으나 소용없었다. 국제 공모는 국제적 사기극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박물관의 질적 저하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중앙청의 8배 규모로 박물관을 짓겠다는 계획이 얼마나 무모하고 폐해가 클지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 후 당선된 설계도를 수십 차례 수정해가며 겨우 박물 관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 건축물이라기엔 여전히 부족함이 많았기 에, 나는 퇴임 후에도 국회를 드나들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 이유는, 박물관 규모가 커지면 그에 걸맞은 학예직 인원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족한 인원을 채우기 위해 한 번에 40명씩 박물관 학예직을 뽑았다. 그것도 여러 번 강행됐 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학예직을 뽑은 사례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학문적으로 자리 잡은 학자들을 스카우 트한다.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질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장차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나는 몇 년이고 투쟁했으나 헛수고였다. 대규모 건축에 따른 엄청난 예산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깊이 밀착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런 와중에 미국 ‘재팬 소사이어티 (Japa n Society, 일본과 미국 간 협력관계 증진을 위한 비영리단체) ’의 알렉산드라 몬로 관장이 찾아와 한·중·일 고대 소금동불을 전시하자고 제의했다. 한국 국립중앙 박물관과 일본 국립나라박물관이 주축이 되어약 5년에 걸쳐 전시회를 추진했다.

미국에서 7~8세기 한·중·일 고대 불상 조각전을 기획하기는 처음이어서인지, 몬로 관장의 신경이 매우 날카 로운 상태였다. 전시회 관련 학자 모임이 한국과 일본에서 여러 차례 열렸다. 수십 년 동안 동양 삼국의 불상 조각을 심도 있게 연구해 왔던 나는, 삼국의 조각 양식이 서로 엇비슷하여 전시를 일목 요연하게 진행하기 어려움을 알았다. 그래서 일본 국립나라박물관에서 열린 최종 회의 자리에 서, 테이블 위에 사진을 올려놓고 논의하던 중 테이블을 모두 치워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 나서 삼국의 불상 조각 양식의 상호관계를 생각하며, 그들의 유기적 관계가 잘 드러나도록 넓은 회의 장 바닥에 사진을 배치했다. 몬로 관장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이번 전시의 틀을 잡아 줘서 고맙 다며, 그는 만날 때마다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기획된 전시가 2001년 뉴욕시 ‘재팬 소사이 어티’에서 열렸고, 나는 개막식에 참석했다.
1997년 1월, 문화부는 나를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발령냈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큰 은총이었다.

왜냐하면 젊은 시절을 보냈던 경주 일원에서, 다시 한번 유적을 치밀하게 조사할 절호의 기회가온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처럼, 다시금 풍토와 조형 예술품의 관계를 심도 있게 추체험할 수있었다. 주말마다 경주 일원을 정교하게 조사할수 있었고, 질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3년 동안 경주 일원과 전국의 유적을 답사하며 수만 점의 슬라이드를 확보하여 강연할 때나 저서를낼 때 활용했다.

경주에서 퇴임을 맞았다. 아마도 모두 퇴임 기념전을 불상 조각으로 준비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에서 연구하며 놀란 것이 ‘기와 예술’이었다. 국제적으로 중국의 기와가 유명 하지만, 통일신라 시대 7세기~9세기에 전 세계 에서 가장 화려하게 기와 예술을 꽃피우고 있음을 알고 퇴임기념전 주제로 기와를 택했다. 삼국 시대 신라 기와, 암막새와 수막새, 그리고 귀면와 들을 중국과 일본 기와 등과 비교하며, 화려하게 꽃을 피운 통일신라 기와를 중심으로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많은 기와 전공 일본 학자들이 다녀 갔다.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퇴임 기념 강연을 할 때, 추녀마루 기와나 사래 기와 등에 조각한 것이 귀신이 아니라 용을 정면에서 파악하여 표현한 것 (귀면이 아닌 용면) 임을 처음으로 만천하에 발표했다. 성덕대왕신종에서 용을 보고는, 용을 정면에서 표현하면 용면와의 모습이 된다는 것을 깨쳤다. 특히 분노하는 용을 앞에서 보면 눈이안 보이는데, 그런 용의 양쪽을 펼쳐서 그린 것이 용면와임을 깨쳤다. 세계 학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귀면을 용면으로 증명한 것이다. 왜 용이 분노하는 모습을 띠는지,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물론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명칭만 바로 잡으려 했을 뿐 상징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아직도 갑론을박 중이다. 수십 년간 귀면이라 가르쳐 온 것을 쉽게 바꿀 수 없음을 안다. 그로부터 나는 용에 관한 연구를 20년째 계속하고 있다.

사진1 경주 월지(月池) 발견, 통일신라 시대 녹유 용면와.
사진1 경주 월지(月池) 발견, 통일신라 시대 녹유 용면와.
사진2 녹유 용면와는 한 가지 색이므로 조형의 전개과정을 알 수 없어서 필자는 작품 해독법인 채색분석법을 개발했다.
사진2 녹유 용면와는 한 가지 색이므로 조형의 전개과정을 알 수 없어서 필자는 작품 해독법인 채색분석법을 개발했다.

용이 세계 미술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그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용과의 만남은나의 학문 역정에서 가히 운명적이었다 (사진 1, 2, 3) . 용면와를 채색분석해보니 세부가 뚜렷이 보였 다. 입에서 영기문이 나오는 것도 알았다. 그 용면와를 해체하여 보고서,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조형이 바로 조형언어였음을,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야 알아보는 감격을 누렸다.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로 2000년 가을학기 첫 강의를 시작했다. 대학교에서 강 의하게 된 것은 하늘이 내게 내린 평생의 은총이 었다. 매일매일 하루 종일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착수한 것이 불상 조각의 광배에 관한 연구였다. 이 연구가 내 학문의 대전환점이 될 줄 몰랐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 무덤벽화 연구에 돌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상 조각의 광배를 흔히 화염문이라 부른다. 일본 학자들이 오래전부터 그렇게 써왔고, 우리나라 학자들도 화염문 혹은 불꽃무늬라고 불렀다. 불상 조각이 주 전공이면서 광배의 실상을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고구려 무덤벽화를 연구하면 혹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구를 시작했다. 무엇인지 모를 벽화의 조형들을 그림으로 그려가며 풀어 나갔다. 이로부터 공배 문양이 여래로부터 발산 하는 강력한 기운임을 조형적으로 풀어내며 증명한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이것이 불상 조각 연구의 대전환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로 부터 내 학문에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일어 났다고 확신하게 된 것은, 2001년 영광 불갑사에 서였다. 당시 나에게 건축 연구는 매우 낯선 분야 였다. 건축에 관한 책을 읽은 적도 없었고, 강의를 들은 적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불갑사 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밤중 대웅전 조사에 들어 갔다. 그런데 천정을 보는 순간, 내부 공포 (栱包) 의형태 구성과 상징 구조가 정확히 잡히는 것이 아닌가! 학문 역정에서 처음 겪는 감격스러운 체험 이었다. 마침내 개안했음을 알았다. 그 이후 모든 것이 저절로 풀렸다. 2002년 한국건축역사학회 에서 사찰 건축의 공포에 대해 발표했다. 한국불교 사찰 건축의 공포를 둘러싼 일련의 의문이 풀리자 이어서 기둥, 초석, 단청 등 건축의 전체가 풀렸다.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다섯 번에 걸쳐 발표하며, 공과대학에 속한 건축학을 인문학적 으로 접근한 최초의 ‘건축사가’가 되었다. 건축과의 만남으로, 내 학문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사진3 채색분석하면서 용면와의 전체를 해체하여 놓으니 바로 기적적으로 찾아낸 조형언어임을 알게 되었다.이 해체된 조형언어를 합하면 사진1의 용면와가 된다.
사진3 채색분석하면서 용면와의 전체를 해체하여 놓으니 바로 기적적으로 찾아낸 조형언어임을 알게 되었다. 이 해체된 조형언어를 합하면 사진1의 용면와가 된다.

2005년 여름, 지인의 권유로 처음 그리스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첫 방문지는 지중해의 아폴론 신전이었다. 열흘 동안 그리스 각지를 답사하며 매일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리스 건축의 세부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내가 본 형태 구성과 상징 구조가 서양의 어느 학자도 밝히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오히려 로마 시대부터 시작된 오류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더욱 깊게 쌓여 왔음을 알았다. 직감적으로 ‘세계미술사’가 정립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지금까지 동양 미술과 서양 미술이 서로 다르다는 것만 강조하려 했지, 둘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증명한 학자는 없었다. 귀국하자마자 그리스·로마 신전의 다섯 가지 기둥 양식 (Five Orders) 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고, 서양 건축의 갖가지 기둥 양식을 모두 분석한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내 2007년, 한국 미술의 중요 작품들을 채색분석으로 해독하여 『한국미술의 탄생』이란 제목의 첫 책을 출판하였다. 책의 부제는 ‘세계 미술사의 정립을 위한 서장’이었고, 시리즈 이름은 ‘형태의 탄생’이라고 붙였다.

글.
강우방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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