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불교 생활] 납득을 의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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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불교 생활] 납득을 의심하세요
  • 원제 스님
  • 승인 2020.02.1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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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제자 중 신통제일이란 칭호를 가진 목건련이 어떻게 죽은 줄 아시나요. 목건련은 이교 도들에게 구타를 당해 맞아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교로 귀의함에 반발한 자이나교의 고행 자들이 목건련을 폭행해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건련이라면 신통을 써서 그렇게 맞아 죽는 것을 피할 수는 있지 않았겠느냐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목건련은 전생에 아내의 이간질에 속아, 부모를 수레에 태워 숲속으로 데리고 가몽둥이로 때려죽인 업보가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 악업으로 목건련은 무수한 세월 동안 무간지 옥에서 고통을 받았지만, 이 마지막 죽음으로 더이상 과거의 업보에 끄달리지 않고 윤회를 끝마 침을 알았기에 자신의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신통제일 목건련이 사람들에게 맞아 죽고, 그러한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전생의 업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는 ‘납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악업을 지으면 그 과보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고, 전생에 지은 악업은 나중에라도 되갚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선악은 분명 해지고, 업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 기에 착한 인연을 지으면 좋은 결과를 받게 되고, 악한 인연을 지으면 나쁜 결과를 받게 된다는 것이,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납득이 되고 믿음 으로 견고해집니다. 경전에는 목건련의 사례 외에도,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납득시켜 줄 이야기 들이 무수하게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떤가요?
경전의 내용과는 달리 이런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잘 납득되지 않는 듯한 사례가 넘쳐납니다. 무수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살아가고 있고, 누구보다 선량했던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납득이 도무지 되지 않는 세상이며 현실입니다. 경전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만, 현실은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경전을 통해 설명된 세상은 완벽하지만, 우리가 발 디디며 살아가는 현실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 투성이입 니다.
이런 불합리를 합리로 전환하기 위해서, 저런 사람들은 전생에 그 어떤 선업과 악업을 지어서 그 과보를 현생에야 받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한편, 지금에 지은 과보들이 내생의 삶에 결과로 나타난다고 믿고그 보상과 처벌을 훗날로 미루기도 합니다. 지옥과 극락이란 이러한 경위로 등장하는 개념들입 니다. 지금 나쁜 짓을 하는 저런 인간들은 내생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다가 돌연히 죽은 그 사람은 극락에 태어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렇게라도 납득을 해야지만 우리는 현실의 불합리한 상황을 대함에 조금은 편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경전의 이야기는 이해가 되는 반면 현실의 실상은 이해가 되질 않고, 그 이해 안 되는 것들을 이해로 옮기기 위해 다른 개념 들을 만들어내고, 그 틀에 맞지 않는 또 다른 경우 를 위해 그 틀을 수정하고, 부가적인 내용을 또 첨가하고, 이를 반복하고…. 이 모든 과정들이 지겹지 않은가요? 진절머리나지 않나요? 삶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라는 내용물에 끌려다니는 것이, 그내용물들을 평가하는 것이, 그 내용물들을 다른 것들로 대체해야 하는 것이, 이 모든 그 과정들이 지겹게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도대체 납득이라는 게 뭐길래, 납득하면 그나마 편안하고 만족스 럽지만, 납득되지 않으면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걸까요. 부디 납득의 다양한 내용물들에 휘둘리지 마시고, 그 ‘납득’이라는 것 그 자체를 크게 한번 의심해보시라는 겁니다. 납득이 도대체 뭐길 래, 우리를 이렇게 휘두르는지 말입니다.
무문관 19칙 평상시도 (平常是道, 평상 이대로가 도이다) 에서 남전 스님이 말했습니다. “도는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데에도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망령된 깨달음이며 모른다는 것은 깜깜하게 어두운 것이니라. 만약 참으로 헤아리지 않고 도에 사무친다면 태허 (太虛) 와 같이 가없이 환하게 트일 것이니, 어찌 굳이 옳으니 그르니할 것인가?” 이 말을 듣고 조주 스님이 단박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남전 스님의 말을 약간 바꾸겠습니다. 도 (道) 는 납득하는 데에 속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데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납득이 된다는 것은 망령된 앎이요, 납득되지 않는다면 그저 까마득하게 어두운 것입니다. 만일 납득의 내용물에 휘둘리지 않고, 이 납득이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여 그 의심이 사무치는 곳에 이른다면, 그 언젠가 허공과 같이 가없이 환하여 트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평상 이대로를 곧장 받아들이지 못합 니다. 그것을 ‘내’가 납득할 수 있게끔 분별의 틀을 만들어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받아 들이는 평상과 현실은 그 틀을 통해서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같은 세계인 듯하지 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해석과 분별을 거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는 것도 사실상 이 틀을 거친 하나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주객 (主客) 이라는 틀 말입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우리는 균형감 있는 주객을 벗어나 나 (主) 라는 중심이 지나치게 강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나’는 납득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납득이 되면 받아들이지만, 납득이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하지만 도나 깨달음은 납득이 됨에도 관여치 않고, 받아들임 여부에도 상관치 않습니 다. 납득이 된다고 해서 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깨달음이 아닌 것 또한 아닙니다. 납득과 받아들임은 순전히 ‘나’의 일이 지, 평상이라는 도와 관계가 없습니다.
부디 의심하십시오. 목건련을 의심하고, 전생을 의심하고, 전생의 이야기를 의심하고, 죽음 이라는 과보를 의심하고, 그 과보의 배경이 되는 선악을 의심해야 합니다. 내용물에 끌려다니지 말고 그 내용물들을 곧장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납득’이라는 그 자체도 의심되고, 납득이 되면 받아들이고, 납득이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 또한 자연스레 의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나’를 의심하는 것이 의심 수행의 핵심입니다. 납득의 내용물들을 의심하고, 그 납득 이라는 과정 자체도 의심할 수 있다면, 납득의 메커니즘이라는 배경에서 온갖 조작질을 벌이고 있는 ‘나’를 곧장 의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곧장 제대로 의심될 적에, ‘나’라는 허망한 실체는 드러날 것이고, 그와 동시에 평상은 눈앞에 여실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여실한 눈앞을 떠나, 생각이라는 감옥에 살아 왔던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평상시도’ 공안에 대해 무문 스님이 송 (訟) 한바 있습니다.

봄에는 갖가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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