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한 물건] 기차에 관한 내 모든 것
상태바
[작가들의 한 물건] 기차에 관한 내 모든 것
  • 임수현
  • 승인 2019.12.04 1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달리지 못하는 연필깎이

나는 기차에 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다. 나는 역이 자리한 마을에서 태어났고, 소년 시절 신문 배달 월급을 받는 날이면 혼자 기차를 타고 1시간 남짓 떨어진 시로 여행했다. 신문에서 오린 영화 포스터와 문화면에서 읽은 소설가 신작 기사가 붙은 일기장은 어리고, 혼자인 승객의 유일한 동행이었다. 대학 시절 초반에는 젖은 머리로 새벽 기차를 타고 그 시까지 통학했다. 아침에는 졸았고, 오후에는 무료했다. 어제 흘러갔던 풍경이 오늘도 되돌아와 나는 딴청을 부리며 다른 곳을, 다른 계절을, 다른 인간을 창밖 풍경에 덧댔다. 지금도 고향에 가 옥상에 올라가면 넓은 들 한가운데로 옮긴 대로 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내 고향 집은 역 주변을 벗어난 적이 없다. 한마디로 나는 역, 역전의 아이였다.

지금도 그 간이역들을 기억한다. 횡천, 양보, 다솔사, 완사, 진상, 옥곡……. 목포에서 부산까지 많고 적건 지금도 누군가의 집이 있을 그 숱한 지명들. 가본곳보다 가지 못한 곳이 훨씬 많은 그 역들을 나는 지금도 거의 외고 있고, 어쩌다 그곳에서 발생한 뉴스를 접할 때면 나도 모르게 ‘나의 기차 시절’로 수렴하곤 했다.

스무 살 시절에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불쑥 어느 간이역에 내려 다음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주변 마을을 서성거리고는 했다. 짧은 일탈의 시간이 배꽃이 흐드러진 봄이었는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이 몰래 과자를 깨무는 것 같은 늦가을이었는지 투명하기만 한데, 어느 집 뒤꼍에 옹기종기 앉은 장독대, 처마 아래 가지런하게 쌓인 하늘색 소주 공병, 하얗게 마른 수돗가와 갈색 펌프, 감나무 아래 놓인 역기……는 지금이라도 손을 내밀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낯선 마을 또한 간헐적으로 기적 소리에 포박되는 역 근처이기는 마찬가지였을 텐데, 내가 그 고요한 오후에 매혹된 건 아마 다른 역의 풍경들을 연습하고 싶어 했던 백일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