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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신화] 아기 붓다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왜 필요했을까?
현자 아시따의 예언을 그린 돌조각파키스탄 간다라 지역 출토 | 3세기 또는 4세기 | 스위스

 

돌잔치의 특별한 이벤트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는 그 아기의 미래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하게 된다. 이 아이가 우리 집안을살려줄 거야, 세상에 크게 이로운 사람이 될 거야. 이런 기대감을 반영한 흥미로운 행사가 아기의 첫 돌잔치 중 진행된다. 하객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기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실뭉치, 연필, 돈, 악기, 붓, 망치 등 아기의 미래를 상징하는 물건 중에서 어느 하나를 먼저 만지거나 잡는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기의 미래를 점쳐보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돌잔치 이벤트를 크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떤 것을 잡았든 그것은 나름대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뭉치를 잡으면 오래 살 것이기 때문에 좋고, 연필을 잡으면 공부를 잘할 것이기에 좋고, 돈을 잡으면 큰 부자가 될 것이기에 좋다고 생각한다. 장난스러운 행사 같지만, 이와 같은 비슷한 이벤트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등 티베트 고승들의 환생을 확인할 때 진행된다는 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티베트 고승들의 환생을 점칠 때는 그 고승의 물건과 아닌 것을 섞어놓고 아기에게 고르게 한다. 만약 그 고승의 물건을 고르면 아기가 고승의 환생일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하게 된다.
전생에 다음 생애에 대한 원력을 세웠다면 돌잔치의 이벤트에서도 그것이 반영될 수 있다. 위대한 분은 대체로 전생부터 큰 원력을 세우고 오기 때문에 그가 미래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어린 시절부터 그 조짐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부처님도 전생에 중생 구제에 대한 우주적인 원력을 세우고 이 땅에 오셨으니, 아기 붓다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등장함 직하다. 그 예언자의 이름은 여러 경전에서 아시따(Asita)로 나타나는데, 『자따까(본생경)』에서는 깔라데윌라(Kāḷadevila)라고도 한다.

현자 아시따의 예언
아시따는 싯다르타 왕자의 할아버지 시하하누(Sīhahanu) 왕과 아버지 숫도다나 왕이 의지하는 사제였다. 그는 오랫동안 수행하여 무색계 선정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다음 생애에는 무색계에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수행하던 아시따는 잠시 도리천에 올라가 있었는데, 수많은 신들이 모여서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시따는 신들을 보고 물었다. “신들이시여, 당신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수라와의 싸움에서 이겼을 때도 이토록 기뻐하지는 않았던 듯싶은데, 어떤 희귀한 일이 있기에 이처럼 기뻐하고 계십니까?”
신들은 대답했다.
“비할 데 없이 뛰어난 보배인 보살이 모든 사람의 이익과 평안을 위해 인간 세계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따는 그 말을 듣고 급히 인간 세계로 내려왔다. 그리고 숫도다나 왕의 궁전에 가서 왕에게 여쭈었다.
“왕이시여, 이번에 탄생하신 왕자는 어디에 계십니까? 저도 한번 뵙고 싶습니다.”
숫도다나 왕이 왕자를 데리고 오게 하여 아시따에게 보이려 하는 순간이었다. 왕자의 몸이 갑자기 궁중으로 붕 떠올라 아시따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 삼매와 신통을 갖춘 아시따는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자기가 먼저 왕자에게 예경을 올렸다. 장차 붓다가 되실 보살로부터 예경을 받는 것은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쪼개지는 과보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에 보살이 신통을 부린 것이었다. 아시따가 예경을 드리는 것을 본 숫도다나 왕도 아들에게 예경을 올렸다. 이것이 숫도다나 왕이 아들에게 올린 첫 번째 예경이다. 불꽃처럼 빛나고 하늘의 달처럼 밝으며 구름을 헤치고 비치는 태양처럼 환한 아기를 보고 아시따는 환희에 넘쳤다. 신들은 천 개의 둥근 고리가 달린 양산을 공중에 펼치고 황금 자루가 달린 불자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시따는 빨간 담요에 싸여 있는 아기를 받아 안았다. 그는 아기의 남다른 상을 살피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이 아기는 최고로 뛰어나며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더니 현자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현자가 우는 것을 보고 석가족 사람들은 물었다. “우리 왕자에게 무슨 불길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시따는 대답했다. “왕자에게 어떤 불길한 상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왕자는 깨달음의 최고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이 아기는 가장 으뜸가는 맑고 순수함을 볼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진리의 바퀴를 굴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덕행은 널리 널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내 삶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내게는 죽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나는 비할 데 없이 큰 힘을 가진 이분의 가르침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수행자 아시따는 가족 중에 누가 붓다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는 여동생 집에 가서 조카 날라까(Nālaka)를 불러 말했다.
“나중에 ‘눈뜬 사람이 깨달음을 펴고 진리의 길을 간다’는 말을 듣거든, 그때 그곳으로 가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그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닦아라.” 이상은 『숫따니빠따』의 『날라까 경』과 『자따까』에 나오는 이야기의 대강이다.

예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신화 속에서 예언은 대체로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어떤 과정이 있건 결과가 예언대로 된다면, 결과가 있기까지의 시련 같은 것이 꼭 필요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예언은 소설에서의 복선(伏線)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예언은 나중에 발생할 중요한 결과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현자 아시따와 유사한 인물이 기독교 『바이블』에도 있다. 그가 바로 시므온(Simeon)이다. 『루가의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시므온은 예루살렘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 있었다.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그래서 시므온은 그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의 부모를 축복하고 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아시따의 예언은 왕자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출가수행자로서 붓다가 되리라는 것이었고, 시므온의 예언은 예수에게 엄청난 수난이 있을 것임을 말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예언에 관한 신화를 보고 우리의 운명도 이처럼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예언 신화는 운명론적인 철학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의 희망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으로서 진리를 깨달은 자가 나타나기를 열망하는 마음이 아시따 같은 현자의 예언에 나타나고, 신의 뜻을 구현할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열망하는 마음이 시므온 같은 현자의 예언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시따의 예언은 싯다르타가 결국에는 출가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고, 시므온의 예언은 예수가 결국에는 비극을 맞이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예언대로 될 것이라면, 더욱이 부처님이 전생에서부터 원력을 세워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면, 왜 29년이라는 긴 세월을 출가할 것인지 말것인지 고민해야 했고, 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행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이 간다. 역시 예언은 신화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화는 인간의 집단적인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 집단적인 소망에 걸맞게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현자의 예언은 위대한 붓다가 현생에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도 싶다. 물론 그런 면이 있지만, 그 또한 인도인이 갖고 있는 집단적 무의식의 소산이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인도인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자수성가형보다는 이미 빼어난 피를 물려받아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이를 더 존경한다. 붓다 신화도 인도인의 집단적 소망의 반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진정한 불자는 예언에 의지하거나 예언을 믿지 않는다.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하고 실천할 뿐이다. 만약 예언을 꼭 믿어야 한다면, 그 예언은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한다면 “반드시 붓다가 될 수 있다!”가 될 것이다.

동명 스님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지홍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았고, 2015년 중앙승가대를 졸업한 후 구족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북한산 중흥사에서 살고 있다. 출가 전 펴낸 책으로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글.
동명 스님
(중흥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

동명스님  bulkwan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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