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한 물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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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한 물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물체
  • 황시운
  • 승인 2019.11.0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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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네덜란드 산 꽃무늬 연필 한 다스와 한국에선 판매되지 않는 연필 몇 자루, 구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던 영국산 빈티지 연필 한 다스, 그리고 연필로 쓴 편지 한 통. 소박하지만 따뜻한 꾸러미였다. 오래된 연필의 향을 맡아보았다. 그윽한 나무 향과 묵직한 흑연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안정됐다. 자낙스를 한 알 더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욕창이 악화돼 2주가 넘도록 샤워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낮없는 통증을 견디느라 땀에 흠뻑 젖었다 마르길 반복하는데 씻지 못하는 괴로움까지 더해져 엉망진창인 날들이었다. 다행히 상처가 꾸덕꾸덕 말라서 방수밴드를 붙이고 활동 보조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샤워를 시도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통증은 여전했지만, 그동안 쌓인 꿉꿉함을 덜어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샤워를 마치고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옷을 입다가 소변줄이 빠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잠깐 사이였지만,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소변에 흠뻑 젖어버렸다. 그걸 본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데 화를 낼 대상이 없었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화가 나서 가슴이 조여들든 말든, 통증 때문에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든 말든, 다시 샤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내내 ‘나는 왜 아직도 살아있나, 이렇게 살아서 얻어지는 게 무언가, 어째서 내 고통엔 끝도 없는 것인가’ 같은 생각에서 놓여날 수가 없었다. 친구가 보낸 연필 꾸러미는 바로 그런 순간에 도착했다. 8년 전 일어난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의 세상도 반 토막 났다. 마비가 일시적인 증상이 아니라 영구적인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두 번 다시는 웃을 수 없을 줄로만 알았다. 더구나 척수가 손상되며 얻게 된 신경병증성 통증을 평생 겪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걸을수 없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나는 반 토막 난 세상에서는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날 리 없다고, 사는 내내 불행 속을 헤매다 비참한 모습으로 죽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자 시시한 농담에 무신경하게 웃기도 했고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했으며 이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욕심내기도 했다. 반쪽만 남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온전한 세상을 살아가던 때의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감정이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고백하자면, 그래서 더 힘이 들었다. 볼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가질 수 없는 걸 욕심내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복기하는 내가 끔찍했다. 그런 시간 속에서 늘 함께한 것이 연필과 종이였다. 고통에 잠긴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가 깊은 잠에서 깬 듯 정신이 들면 사각사각 아무 말이나 끼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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