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 스님은 1914년 경북 풍기에서 출생, 28년 예천 서악사에서 출가하였다. 36년 김용사에서 비구계를수지하였으며 김용사 강원 사교과를 수료하고, 일본대학 종교학과 3학년을 중퇴하였다. 예천에 포교당 설립, 갑사의 토굴에서 단식 수행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 40안거를 성만하였으며, 문경 봉암사 조실로서 선풍을 진작시켰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로회의 의장, 종정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대구 팔공사 제2 석굴암에 머무르면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고 대중포교운동을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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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이 먼 데까지 무엇하러 오려고...힘든데 올 것까지 없어요"라는 서암 큰스님의 말씀 속에는 따뚯하??배려가 녹아 있었다. 그에 힘입어 재삼 청원드리자, 4월 초순에 서울 갈 일이 있으니 그때 보자는 약속을 해주셨다.
약속 당일 서울 삼각산 중흥사 개토제(開土祭)에 참석하신 서암 큰스님은 매우 건강해보이셨다. 서암 큰스님은 "태고보우국사께서 창건하신 중흥사가 터만 남아 있어 마음이 아팠는데 역사적인 이 도량을 건립하여 불교발전의 초석으로 삼고, 국민정신을 통일시키는 도량으로 일구어 남북분단을 극복하자"는 내용의 법어를 내리시며 불사가 원만히 회향되기를 축원하였다. 개토제가 끝나자마자 서암 큰스님은 또다른 일정을 위해 서둘러 산을 내려가셨다. 젊은 사람들이 못 따라갈 정도로 가볍게 내려가시는 스님을 겨우겨우 따라가며 몇말씀 여쭈었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산길을 걸어가시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톤으로 물 흐르듯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기자는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삼각산을 법당 삼은 웅장한 법석이었다.
지나는 새들도 솔바람소리까지도 잠잠히 스님의 말씀을 경청하듯 고요한 산 속에서 스님의 법향(法香)이 봄햇살 처럼 퍼져 나갔다.
-스님,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나야 떠돌이 중이니 떠돌아 다녔지요.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이리저리 인연 닿는 대로 떠돌아 다니면서 중이 하는 소리 듣고 싶다면 해주고 다녔어요."
-스님, 미국에 가셔서 포교하시는 등 대내외적으로 무척 바쁘게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가서 포교를 안 했다고도 할 수 없고 했다고도 할 수 없지요. 여러 교수들을 만나 이야기했는데, 어느 교수는 '지식으로 짜내는 이론을 탈피한 공부, 입 열지 않고 하는 공부를 일러 달라'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상념의 세계는 접어두고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세계, 인생의 참모습을 이야기해달라는 것이었어요 어쨌든 인간의 실상에 대해 탐구하는 자세가 매우 인상적이었지요."
-그 교수처럼 요즘 미국사람들은 아니 미국사람뿐만 아니라 현대 서구인들은 서양문명에 한계를 느끼며, 동양사상 특히 불교사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글쎄 그런 것까지는 내가 모르겠고, 불교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이 퍽 많은 것은 사실이예요. 그들은 신 중심의 서양문화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서양의 종교는 자기는 없고 신만 의지하는 종교인데, 물질문명이 치성해지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서구 종교는 사실상 쇠퇴일로를 걷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서구의 학자들은 현대를 서양문화가 벽에 부딪힌 위기의 시대라고 진단하면서 그 구원을 동양의 불교,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님을 설파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찾으려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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