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 개론] 죽음과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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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불교 개론] 죽음과 자비
  • 장휘옥 김사업
  • 승인 2019.11.0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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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곳 남해안 외딴섬 오곡도의 토박이 주민들은 학력이 그리 높지 않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한 분들이 많다. 간혹 주민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져 격한 지경까지 달하면 누구의 입에서라도 불쑥 튀어나오는 말이 있다. “언젠가는 다 죽는다!” 다 죽는데 이렇게 싸워서 뭐 하겠느냐는 뜻이다. 그렇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다 두고 죽는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갈까? “재산을 좀 더 모았으면 좋았을 걸, 좀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갔으면 좋았을 걸…” 하면서 떠날까, 아니면 “좀 더 선하게 살면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좀 더 잘해 줄 걸…” 하면서 떠날까?

| 삶에 죽음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살았다는 케마(Khemā) 비구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왕족 출신인 그녀는 살결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의 첫 번째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림정사에 계시는 석가모니를 찾아뵈려고 하지 않았다. 석가모니가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미모를 얕보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빔비사라왕은 시인들에게 죽림정사의 빼어난 풍경을 찬탄하는 시를 지어 읊도록 명했다. 그 시를 듣고 케마는 죽림정사에 가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만 석가모니와 마주치고 말았다. 석가모니는 신통력으로 케마의 눈앞에 천상의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어 내었다. 케마가 자신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그 천상의 여인을 응시하자, 젊고 아름다운 그 천상의 여인은 한순간에 흉한 노파로 변하더니 죽고 말았다. 젊음과 미모가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에 놀란 케마에게 석가모니는 조용히 욕망의 허망함을 설했다. 케마는 왕의 허가를 얻어 출가했고 후에 깨달음을 얻어 뛰어난 지혜로 찬탄받았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 중의 하나가 ‘무상(無常)’이다. 무상은 ‘모든 것은 생하여서는 멸한다. 멸해 가는 과정이 한순간도 멈추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무상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진리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은 원하는 것이 늘 함께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무상이 예외인 것처럼 오인하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 어리석음과 애착을 배반하여 애지중지하는 것이 소멸해 갈 때 중생은 심장을 후벼파는 고통을 겪는다.

애착이 있으면 동시에 고통이 있다. 애착과 고통은 둘로 나누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물의 생겨남과 소멸도 함께 있으며 둘로 나누어질 수 없다.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나 자신은 한순간도 정지함이 없이 시시각각으로 죽어 가는 과정에 있다. 살아 있는 내 속에 늙음과 죽음이 함께있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케마에게 보여 준, 젊고 아름다운 천상의 여인이 한순간에 노파가 되고 시신이 되는 모습이 바로 너와 나의 실상이다. 지금까지의 언급을 우리는 사실로 인정은 하면서도 떠올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삶, 억지로 희망을 부여안고 살고자 하는데 웬 기죽이는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있는 사실을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직시할 때 초월의 문은 열린다. 문학에서 비극이 있는 이유는, 비극이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본질적이며 숭고한 것인가를 알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티베트 고승은 “새벽에 무상을 관하지 않으면 한낮에는 벌써 온갖 욕심에 젖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진 기법에 ‘이중 노출(Double Exposure)’이란 것이 있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두 모습을 겹쳐서 표현하는 기법이다. ‘이중 노출’처럼 젊고 발랄한 현재의 내 모습과 늙은 내 모습, 죽은 내 모습을 겹쳐서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석가모니는 “젊고 기운찬 속에 늙음이 있고, 무병에 병이 있으며, 삶에 죽음이 있다(『상윳따 니까야』 48.41)”고 말씀했다. 늙음과 죽음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각성해야 한다. 이러한 각성의 눈으로 보면 내 삶과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늙음과 죽음은 거부하고 원망할 일이 아니다. 생겨난 모든 것이 따라야만 하는 만고불변의 이치이며, 자연스런 일이다. 다만 낙엽이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듯이, 원망 없이 늙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원망 없이 떠날 수 있을까?

| 빈손으로 오지 않고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과연 빈손으로 왔다가 떠날 때도 빈손으로 갈까? 그렇지 않다. 어느 누구라도 세상을 떠날 때 빈손으로 가지 않고, 새로 태어날 때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민태는 부유하게 살아 보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가난 때문에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오직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설움과 수모를 참아 가며 돈을 벌었다. 그래서 나이 예순 가까이 되었을 때 서울 강남의 요지에 자그마한 빌딩 하나를 소유하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투자한 빌딩이었다. 누가 그 빌딩을 강제로 압수라도 하려 든다면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절대 빼앗길 수 없는, 그런 빌딩이었다. 하지만 그 민태도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빌딩을 갖고 가지 못했다. 목숨보다 귀한 빌딩을 두고 떠나갔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죽을때는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재산·명예·자식 등도 가져가지 못한다. 이런 서글픈 현실을 일러 ‘공수거(空手去), 빈손으로 간다’고 한다. 하지만 민태는 결코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몸으로 한 행위, 말 한마디, 생각 하나도 그 씨앗을 남기고 사라진다. 선한 행동은 선한 씨앗을, 악한 행동은 악한 씨앗을 ‘아뢰야식’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마음에 남기고 사라진다. 마치 씨씨티비(CCTV)에 그 앞의 움직임들이 고스란히 기록되는 것과 같다. 씨씨티비가 아뢰야식이라면, 그 앞의 움직임은 자신의 행동(신·구·의 3업)이 남기는 씨앗들이다. 행동이 남기는 씨앗을 불교에서는 종자라고 부른다. 아뢰야식에 남겨진 이 종자들은 굉장히 높은 수행 단계에 이를 때 까지는 사후에도 소멸하지 않는다.우리 마음은 8가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가장 근본을 이루는 마음이 아뢰야식이다. 아뢰야식은 우리 마음의 뿌리에 해당하며 일종의 무의식에 가깝다. 땅속에 있는 뿌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듯이, 아뢰야식은 그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작용한다.

식물의 씨앗에 적당한 수분과 양분이 갖추어졌을 때 싹이 나오듯이, 자신의 아뢰야식에 남겨진 종자에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본인에게 행·불행의 과보가 찾아오거나 그 종자에 맞는 새로운 행위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악업이 남긴 악의 종자에 적당한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불행이 찾아오거나 또다시 새로운 악업을 행하게 된다. 따라서 민태는 빌딩은 가져가지 못했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 한 푼 넣었을 때 남겨진 종자, 마음에서 우러나온 미소 한 번 지었을 때의 종자, 악담 한마디 종자, 그 모든 종자는 고스란히 다 간직하고 다음 생으로 갔다. 윤회하는 과정에서 민태는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그 종자에 합당한 과보를 받게 된다. 견도(見道)라고 불리는 높은 수준의 수행 단계에 이르지 못한 중생인 한,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이 남긴 종자를 다 가진 채 떠나고 태어난다. 과녁을 세우지 않았다면 화살이 와서 꽂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 온 악업이 과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해악의 화살이 날아와 꽂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또다시 악행과 악담과 악심으로 과녁을 만들어 세우면 앙갚음의 화살이 또 날아와 꽂히게 될 것이다. 과녁은 나 자신이 세운 것이다. 남에 대한 원한과 앙심과 분노의 행동으로 과녁을 끝없이 세워서 세세생생 그 화살을 맞겠는가? 지금 우리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일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지어 온 업의 결과가 때가 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각자가 원하는 대로만 일들이 전개된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다 할 수 있을 만큼 선행을 쌓아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상대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도 자신이 형성해 온 성격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적대감과 분노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적대감과 분노 등이 일어날 때,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그에 따른 행동을 폭발시키는 등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단지 그러한 감정을 주시하면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다.조건이 갖추어졌기에 생겨난 그 감정은 그냥 내버려 두면 소멸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 감정도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적대감과 분노에 대해 정당화하는 등의 반응이 거듭되면, 이 반응이 조건이 되어 적대감과 분노는 기름을 만난 불처럼 되고 만다. 이 점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생인 우리는 남들에게서는 아주 작은 잘못까지도 잘 찾아낸다. 그러나 막상 자기 자신의 커다란 잘못은 알아채지 못한다. 남들의 잘못을 들추어내려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대신,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와 공감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나에 대한 경멸의 말을 듣거나 건방진 대우를 받았다면 나는 이에 대해 곱씹으며 오랜 시간동안 마음 아파한다. 상대도 마찬가지다. 그도 나만큼이나 나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 마음 아파한다. 그의 아픔을 공감한다면, 과연 그런 말을 내뱉고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숫따니빠따』 705게는 이렇게 읊고 있다. “‘그들도 나와 같고, 나도 그들과 같다’고, 내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 나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새벽 기도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절절한 진심과 정성에 틀림없이 감화받는다. 내가 어머니의 심정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따뜻한 말과 행동을 하면 상대도 나만큼이나 감화받고 고마워한다. 어렵고 힘들었을 때 얼마나 나는 도움을 갈구했던가?

어렵고 힘든 모든 사람이 나처럼 그 도움을 갈구하고 있다. 뭇 생명에게 행복과 평안을 주고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을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한다. 흔히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듯이,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모든 교리와 수행의 기본이다. 지혜와 자비를 함양해 나갈때 우리는 삶과 죽음의 과정을 평안히 보낼 수 있다.

 

|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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