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상태바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 원제
  • 승인 2019.10.29 10: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와 세상에 속지 않고 사는 법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저작·역자 원제 지음 정가 16,000원
출간일

2019년 11월 1일

분야

분야_인문(철학/종교)

책정보

판형_142 * 220 mm

두께_14mm_280쪽_4도

ISBN 978-89-7479-744-7(03100)

구매사이트
교보문고
Yes24
인터파크
알라딘
책소개 위로

나와 세상에 속지 않고 사는 법,

선방 수좌의 13년 공부 기록!

2006년 출가하여 2011년부터 틈틈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수행기를 올리며 신선한 반향과 공감을 일으켜 온 선방 수좌, 원제 스님의 글 모음이다. 저자는 종교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세상이 가짜 같아 삶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자해를 할 만큼 극심하게 방황하다 불교 수행자의 길을 택했다. 엄격한 자기 절제와 치열한 선원 생활은 수없이 많은 물음을 열어젖히는 과정이었다. 그 질문의 끝에서 저자는 어떤 답을 구했을까. 삶은 자기가 아는 만큼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아는 것을 끝없이 넓히려 애쓴다. 그러나 그 아는 것이 오히려 삶을 가로막는다. 삶에 대한 모든 의문을 꿰뚫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앎, 이 책은 그 앎에 대한 저자의 공부 기록이다. 수행 과정에서 겪은 갈등과 성찰, 그리고 깨달음의 순간을 통해 독자는 이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받아들임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고정된 실체란 없습니다. 실체화라는 망념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로 향한 편중된 집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렇게 그릇된 질문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사람과 세상은 이미 그대로 답입니다. 질문한다면 고민이지만, 답이기에 누리는 것입니다. 답은 펼쳐진 것이고, 확인하는 것이고, 누리는 것이고, 써먹는 것입니다. 답은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잘못된 질문이 멈춰지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답으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위로

저자 | 원제(圓帝)

세상이 가짜 같아 삶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그런 세상에 잘 적응은 했으되, 현실에서 5센티미터 정도 떠 있는 듯한 분리감에 많이 힘들었다. 사람과 인생을 모조리 알게 된다는 3수를 거친 방황의 끝에 서강대학교에 들어갔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사람과 인생 모두 혼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종교학을 전공하면서 불교를 접했는데, 그간의 모든 방황과 실패가 불교를 만나기 위함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불교 강의 학점은 D였다. 그래도 결심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살겠노라고. 군 시절 ‘고무신’이었던 착한 여인에게 홍대 앞에서 거침없는 하이킥으로 두들겨 맞는 진리를 경험한 후 출가를 결정했다.
2006년 해인사로 출가, 도림법전 스님의 제자로 스님이 되었다. 그러나 선원에서의 수행은 녹록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에라 모르겠다, 세계 일주나 가자!’ 하고 2012년 9월부터 2년여간 티베트 카일라스를 시작으로 5대륙 45개국 세계 일주를 했다. 수많은 고생을 한 후 수행은 훨씬 수월해졌다. 이후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삶의 좌우명으로 그냥저냥 쉬는 듯 노는 듯 지내고 있다. 현재 김천 수도암에서 정진 중이다.

목차 위로

들어가며 | 사람과 세상은 이미 그대로 답입니다

1장 아주 오래된 질문 : 나는 누구인가

intro.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한 것 * 봄바람

서핑 | 꿈속에서 만난 여인 | ‘나’는 하나의 흐름이다 | 눈앞이 따라 다니다 | 거기에 그대가 없을 때 | 주인 의식과 객 의식 | 제일 가까운 친구 | 존재는 전부를 가지는 것 | 모두가 나의 일 | 모든 존재가 본래 그러합니다 | 니 얘기 | 나의 암소는 무엇인가 | 존재 이유

2장 삶에 대한 의심 : 내가 ‘나’가 아닐 때에야 속지 않는다

intro. 영원한 사랑 * 진실 *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마라

하정우의 마지막 식사 | ‘나’라는 통로 | 떨어진 감 | 자승자박 | 스승은 있다 | 공덕천과 흑암녀 | 벽을 넘는 용기 | 킬링 법문 | 내 등불을 꺼야지만 | 눈먼 자여 눈을 떠라 | 좀비와 해바라기 |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

3장 문제인가 상황인가 : 흐름에 나를 싣다

intro. 자신감 * 침묵 * 기회

판단 중지 | 보내는 연습 | 왜 문제를 극복하려고만 하는가 | 새야, 새야 | 중고나라 김군 | 법륜 스님은 낚시꾼 | 상황과 대응 | 이만하면 됐다 | 하나님은 청하기도 전에 응답하셨다 | 간판이 무슨 상관 | 가장 훌륭한 대비

4장 절벽의 끝으로 : 내가 쓰는 드라마를 끝내야 할 때

intro. 불혹 * 칭찬과 비난

견디는 것이 전부이다 | 되는 노력 | 삶을 바꾼 15분 | 지금 당장, 침 한번 멀리 뱉어보세요 | 무조건 | 그 고통이 누구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 적당히 건강하고 적당히 행복하세요 | 여인숙 | 정화와 감화

5장 그물에서 바람으로 : 아무것도 아닐 때 비로소 아무거나 될 수 있다

intro. 그물과 흐름 * 걸림돌과 디딤돌 * 가랑비

삶이라는 드라마의 끝 | 비움의 공덕 | 세상이 숨을 쉰다 | 갇혀 살 때는 모릅니다 | 순종과 자유 | 텅 빈 충만 | 무소유 | 다시 태어나도 우리 | 묵언 | 한소식 일러 봐라 | 새해 첫 하루

상세소개 위로

따듯한 힐링과 위로, 지혜의 말 속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혼란스럽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까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우리를 위로하는 따듯한 힐링의 말과 소소한 지혜를 ‘치트키(cheat key)’에 비교한다면, 저자의 말과 글은 무사의 정공법을 닮았다. 이를테면 덮어두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라, 삶의 공포 속으로 들어가라, 지금 내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눈앞의 그것, 지금까지 믿고 의지해 온 모든 것을 몽땅 의심하라고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잘 속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불행과 문제에 대한 원인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탓으로 돌리기를 반복하는 이에게 저자는 ‘자기 상처를 현실을 피하는 도구로 삼지 말라’고 직언한다. 자신을 주연으로 한 드라마틱한 삶과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지나친 추구가 오히려 자유로운 삶을 구속한다며, ‘당장 내가 쓰는 이야기에서 벗어나라’고도 한다. 아픈 충고다.

그래서 저자의 말과 글은 종종 ‘힐링(healing) 법문이 아니라, 킬링(killing) 법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킬링은 죽인다는 뜻이다. 내가 아는 것, 알고 있다는 믿는 그것, 내가 지금 애지중지하며 붙잡고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이 완전히 멈춰지고 사라질 때 비로소 진짜 나, 진짜 가야 할 길이 보인다. 마치 어두운 밤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을 껐을 때 달빛이 환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사람은 ‘지 생겨먹은 대로만 살아도 문제없다’라고 말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제가 힐링보다 킬링을 주로 하게 되는 이유에는 ‘선(禪)’이라는 공부 방식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선은 ‘의심’의 수행입니다. 눈앞의 감각 대상과 경험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며, 거리를 두는 것이고 속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진리는 찾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

일상에서 진리는 어떻게 펼쳐지는가

저자는 진리를 찾기 위해 불교 수행자의 길을 택했다. 여느 사람들이 과학자나, 소설가, 건축가를 선택하는 것처럼 저자에겐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경전과 어록 공부, 참선, 묵언 수행 그리고 2년 동안의 세계 일주 만행…, 많은 좌절과 갈등 속에서 바깥이 아닌 자신을 향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을 거치며 온몸으로 불교적 진리를 체득했다. 그 진리의 끝은 ‘나’에 머물지 않고 ‘전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에고(ego)와 아상, 무상과 무아, 공, 불성, 참나…, 머리로만 알고 있는 이런 교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저자는 선원 생활, 출가 전의 일, 만난 사람들, 책, 영화, 게임 등 자신의 모든 경험을 이용하여 들려준다. 저자가 평소 자주 하는 말처럼 ‘전체’의 삶을 위해 자신을 ‘써먹는’ 것이다.

〈왜 문제를 극복하려고만 하는가〉에서 지도하던 행자가 절집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절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저자는 딱 보름만 참아보라고 한다. 보름 동안,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하고 문제도 변하고 그 문제를 대하는 행자의 마음도 변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보름 뒤, 절을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심각했던 관계의 문제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되었고, 행자는 다시 수행에 전념했다. 무상(無常),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저자는 삶으로, 경험으로 상기시켜 준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을 예로 든 〈벽을 넘는 용기〉에서는 벽과 숲으로 대비되는 안전한 삶과 불확실한 삶을 통해 우리가 만든 견고한 아상(我相)을 설명한다. 동료 스님을 죽이고 싶었을 만큼 들끓었던 분노를 ‘인내’로써 이겨내며 인생은 오직 견뎌야 하는 것임을, 그렇게 잘 무사히 지나가면 진정한 자유를 느낄 때가 온다며 응원한다.

저자의 솔직한 고백과 엄격한 문체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 이야기들의 끝은 무엇일까. 바로 작고 좁은 이기적인 ‘나’에게서 벗어나 온 우주, 전체로서의 ‘큰 나’, ‘참나’로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본질적인 삶을 마주하며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판때기’

놀이로서의 삶을 권유하다

저자가 세계 일주할 때 만난 국가대표 서퍼는 이렇게 말한다.

“스님, 저는 이 판때기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신의 삶은 지금까지 보드판 위에서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서퍼의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사실 자기만의 판때기 위에서 살아간다. 흔히 인생을 고해(苦海)에 비유한다. 그리고 파도는 인생의 크고 작은 다양한 고통이라고 한다. 저자는 파도를 바라보며 분석하고 이런저런 의미를 넣어 규정하지 않겠다고, 곧장 바다로 뛰어들겠다고 한다. ‘원제’라는 판때기가 있고 말과 글, 생각이라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판때기는 어떠한가.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매 순간일 뿐, 나에게 닥치는 상황마다 그때그때 ‘잘’ 보고, ‘잘’ 판단하고, ‘잘’ 대응하면 되는 것이다. 그 ‘잘’에 대한 리듬의 감(感)을 늘이는 데 이 책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의 마지막 당부이다.

절집에서 큰스님들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경전에 나오는 말이고…, 그거 말고 니 얘기를 해봐, 니 얘기.”

저는 매일 매일이 정면승부입니다.

오늘도 눈 똑바로 뜨고 여지없이 정면승부를 합니다. (-본문 중에서)

 

선방 수좌 원제 스님의 킬링 법문 9

“나와 세상에 속지 않고, 두려움이 사는 법”

1 꼭 근사한 삶의 의미가 있어야 할까 : ‘나’는 삶이라는 드라마를 무언가 그럴듯한 의미로 채우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채워진 것은 다른 형태로 변하거나 또 다른 좋은 것들로 채우려고 합니다. 이런 욕망의 악순환을 멈출 때 삶은 온전하게 펼쳐집니다.

2 무엇이든 의심하기 : 지금 나의 생각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나’라는 존재, 생각 자체를 의심해 보아야만 합니다. 제대로 의심하게 된다면, 열린 만큼 경험하게 되어있고, 깨어난 만큼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3 자신이 의지하는 등불을 꺼라 : 등잔불을 끄면 본래 있던 달빛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등잔불처럼 내가 믿고 따르며 소중히 여기는 어떤 가치와 믿음은 무엇인가. 그것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전체로서의 삶이 드러납니다.

4 판단 중지 : ‘내가 모른다고, 혹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거나 그런 것은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단지 내가 모를 뿐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면 될 일이지, 상대방이 틀렸다고,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 공부할 기회를 놓칩니다.

5 자신의 상처를 이용하지 마라 : ‘과거의 상처 때문에 지금 내 모습이 이래….’ 과거의 고통과 상처를 이용해 현재를 피하지 마십시오. 고통과 상처를 보내는 연습을 하십시오. 힘들지만 천천히 잘 보내는 연습을 하면 어느 순간 본래 있던 자유가 곧장 눈앞으로 찾아들 것입니다.

6 문제는 없다. 상황이 있을 뿐 : 우리 삶에 고정된 문제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만이 있을 뿐. 상황은 그때그때 ‘잘’ 보고, ‘잘’ 판단하고, ‘잘’ 대응하면 됩니다. 이 ‘잘’을 미리 정해놓지는 마십시오.

7 ‘나’는 이겨서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니다 : ‘나’란 것도 알고 보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상황입니다. 변화하는 상황에 어떻게든 대응해나가는 것, 솔직하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참을 인(忍)’입니다.

8 행복만을 선택하지 마라 :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것들만 고르려는 선택을 멈추십시오.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허용해 주십시오. 그러면 기쁨도 우울도, 어두운 생각도, 분노도, 그 모든 게 이미 다 진리로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9 진정한 용기란 나를 놓아버리는 용기이다 : 나를 지키는 용기가 아니라 나를 놓아버리는 용기입니다. 아는 것도, 의지할 것도, 붙잡을 것도 없을 때 도리어 진정한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책속으로 위로

서문 중에서

저는 출가해서 선원에 살고 있는 수행승입니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아들이며, 누군가에겐 오랜 친구이고, 어느 공부인에게는 스승이며, 세계 일주를 한 여행가이며,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땡중이고, 틈틈이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여러 삶이 있는 것뿐 아니라, 단 한 개인에게도 이처럼 다양한 삶의 모습과 역할이 있습니다. 답을 정해서 고정시키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이미 답은 다채롭게 펼쳐져 있습니다. 어느 한 역할에만 머무르려 고집하지 않는다면 동시에 여러 역할들도 아무런 걸림 없이 원만하게 이루어 갈 수 있음을 저는 저의 ‘중놀이’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들어가며, ‘사람과 세상은 이미 그대로 답입니다’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비싸고, 더 화려하고, 더 소중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그건 빛입니다. 만일 빛이 없다면 다이아몬드는 볼품없고 쓸모없는 작은 돌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빛이 있기에 다이아몬드가 빛이 나고, 화려해지며, 값비싼 보석이 됩니다. 그런데 정작 빛 자체에는 값이라는 게 없습니다. 무색투명하기에 화려함도 없으며, 그냥 자연스레 당연히 있는 것이기에 비교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희귀함도 없습니다.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한 것, 다이아몬드에만 현혹되지 말고 빛을 보십시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이 빛이야말로 무가진보(無價眞寶), 즉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진정한 보배입니다. 가격이 없는 게 진정으로 비싼 것이고, 화려함이 없는 게 진정 화려한 것이며, 희귀함이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소중한 겁니다. 볼 수 없는 이 빛을 보아야만 하는 겁니다. (14쪽)

제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삶의 경험입니다. 되도록 직접 겪은 일을 쓰려 합니다. 혹 누군가가 들려준 경험을 듣고 쓰기도 합니다. 개념이나 원리 해설은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끔 그런 글을 읽기도 하지만 보통은 보지 않습니다.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잘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원리는 이렇고 개념은 이러한데, 과연 내 삶은 어떠한가. 당장 내 눈앞에서 펼쳐진 삶이 불교 경전이 가르치는 진리와 부합되는 삶인가. 그것에 어긋나지 않는가. 그 진리가 삶의 경험으로 일치되게 펼쳐지는가. 내 생각이 정말 그리 조정되었는가. 다른 사람의 존재가 정말로 그리 다가오는가. (59쪽)

내가 집중하는, 내가 얽매인 그 대상들을 하나하나 지워 보십시오. 내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그 사람이 없다면, 사회적인 이슈가 없다면, 내가 어떤 일을 행하고 있지 않을 그럴 때에도, 그렇게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이 그 어떤 것도 없을 때엔 어떤가요? 대상에 필요 없이,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가요? 대상에 의존 없이, 나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세계가 가득할 수 있나요? 대상에 걸림 없이,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나요? (62쪽)

그 뒤에도 1년여 동안 어떤 노장이 꿈속에서 틈틈이 저를 찾아와 또다시 허벅지를 주무르기는 했지만, 제가 버럭 화를 내고 단호하게 말한 이후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경험을 두고 ‘저런 세계가 느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의 의미를 새기면 됩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저러한 세계가 ‘있다’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세계를 좋아하고, 그 세계로 다가가면, 그 세계가 ‘있게 되는 것’이 됩니다. 부처님은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할 뿐이지, 쓸데없이 귀신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귀신의 세계를 좋아하고, 귀신의 세계로 다가가면, 귀신의 세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신의 세계를 받아들이면 제 스스로 귀신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06쪽)

‘무엇이든 와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건 무엇이든 상대하고 이겨낼 수 있다는 그런 종류의 자신감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가질 게 없으니, 무엇이든 잘 보내줄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무엇이든 와라. 다 보내주마. 이런 자신감도 있는 것입니다. (130쪽)

“모든 진실은 밝혀져야 하는 걸까요?”

“아니.”

“진실인데, 왜요?”

“문제는 그것이 진실이다, 진실이 아니다, 밝혀진다, 밝혀지지 않는다, 그런 게 아니야. 내가 그 진실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느냐의 것이지. 설혹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본인을 해칠 수가 있어. 자신이 그럴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차리라 모르는 게 나을 수 있다는 거야. 그 진실을 제대로 맞이하고 제대로 소화하고 제대로 보내주는 것이 힘든 일이고, 그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잘 없기도 하고….”

영화 〈완벽한 타인〉을 본 어떤 친구가 물어온 내용과 대답입니다. 진실은 물론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진실을 받아들일 내 자신이 제대로 준비가 되었는가, 면밀히 자문하는 일입니다. 준비가 되었다면 진실을 부리며 살아가겠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도리어 진실에 부림을 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67쪽)

어떤 사람은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찾으려고 합니다. 자신만을 사랑해 줄 그럴 사람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되고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랑을 찾는 그 사람의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고 뒤바뀌는 까닭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할 게 아닙니다. 단지 내 마음이 변한다는 것을 스스로 명백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나의 마음이 한결만 같다면, 그때에는 영원한 사랑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한결같음으로 사랑을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구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되는 겁니다. (66쪽)

‘불기자심(不欺自心),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속이는 것을 아는 것은 쉽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속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속지 않는 것은 어렵습니다. 많이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속이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겁니다. 이를 바로 아는 것도 어렵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힘들고, 그 후에 나를 쓰는 것으로 가기까지도, 길고도 어려운 여정인 겁니다. (69쪽)

공부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의 용기는 상황이나 대상에 굴복되지 않고, 자신이나 자신의 뜻을 지켜나가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무언가를 대상으로 해서 싸우고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수행에서의 용기는 전혀 다릅니다. 그 대상이 밖으로 향한 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한 의심을 하는 용기이고, 작은 집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지는 용기입니다. ‘이게 나다’라는 관념이나, 혹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나, 내가 추구하는 그 어떤 가치가 있다는 믿음까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줄 아는 용기입니다. 편안함을 버리고 오히려 무지와 불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용기입니다. (100쪽)

랜턴을 켜면 물론 내 눈앞의 길은 밝아집니다. 길이 명확하게 보이고 걸려 넘어질지도 모를 돌부리도 잘 보입니다. 그런데 랜턴을 켜지 않는 것은 산에 내리는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밝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랜턴을 켜면 도리어 더 어두운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내 바로 눈앞만 지나치게 밝아지는 탓입니다. 그리고 그 유난히 밝은 눈앞만 따라 걷다 보면 주변 전체는 오히려 어두워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본래 그리 어둡지 않은 곳이 랜턴의 빛 때문에 훨씬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109쪽)

클리커(좀비)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좀비는 어떤 악랄한 성격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악행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극에 반응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그 반응이란 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반응입니다. 곧 상대방을 해치는 게 목적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클리커에게는 어떤 번뇌나 괴로움도 없습니다. 자극에 반응만 하는 어떤 생명체도 우리 인간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번뇌와 욕망으로 고통 받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번뇌와 욕망이라는 원인을 만들고 이에 집착하여 고통이라는 결과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토록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클리커보다 못난 존재가 아닌가요? (121쪽)

수행을 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답을 구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의심하는 삶입니다. 답을 구하려는 삶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아 나서고 구한 것들을 축적합니다. 축적한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여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의심하는 삶은 축적된 것들을 돌이켜보고, 의심되는 것들을 비워갑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자리를 돌이켜봅니다. 그리하여 두 삶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구하는 삶은 여전히 밖을 향해 나서게 되고, 의심하는 삶은 곧장 그 자리에서 멈춰지게 됩니다. 답이란 결코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멈춤으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함이 멈춤으로써, 그 모든 것들이 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37쪽)

언론사 서평 위로
내용을 입력하세요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