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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
저작·역자 노승대 지음 정가 28,000원
출간일 2019-10-10 분야 한국사-한국문화
책정보

46배판 변형(170*230)

ISBN 978-89-7479-697-6(0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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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게, 수달, 토끼, 돼지에서 도깨비, 야차, 삼신할미, 신선까지

사찰 구석구석의 보물찾기

저자소개 위로

노승대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했다. 1975년 출가해 광덕 스님을 은사로 모셨으며 10여 년 뒤 환속했다.

구도의 길에서는 내려왔으나 그 길에서 찾았던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은 내려놓지 않았다. 에밀레박물관 조자용 관장님께 사사하며, 관장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18년간 모셨다.

1993년부터 문화답사모임 ‘바라밀문화기행’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인사동 문화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인사동 문화학교 졸업생 모임인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회원들과도 전국 문화답사를 다니고 있다.

그는 가족 같은 동호인들과 함께 우리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공부하는 것을 금생의 의무라 생각하고 지금도 항상 길 위에 있다.

답사 틈틈이 ,사람과 산>, <월간 불광>, <템플스테이> 등에 우리 문화와 관련된 글을 기고하여 왔으며 『바위로 배우는 우리문화』(무한, 1999)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목차 위로
Ⅰ 사령과 사신
거북
호랑이
용(용1. 용들의 천국 / 용2. 용의 아홉 아들 / 용3. 용면와냐 귀면와냐)

Ⅱ 육지와 수중의 생물
물고기

수달
토끼
돼지
코끼리
사자

Ⅲ 상상과 전설의 주인공
도깨비
장승
악착보살
야차
가릉빈가
삼신할미
신선

Ⅳ 꽃과 풀
연꽃
모란
포도
매란국죽
상세소개 위로

법당의 현판 옆을 뚫고 고개를 내민 청룡과 황룡은 꼬리가 저쪽 법당 뒤편까지 뻗어 있다. 아예 법당을 달고 날아오를 기세다.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그 옆에는 야차가 힘겨운 표정으로 사찰 지붕을 이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기둥에는 용에 쫓긴 수달이 나 살려라 달아난다. 고기를 물고 있기 때문일까? 불단 아래쪽에서는 가재와 게가 맞서 겨루고 있다. 누가 이겼을까?

또 한쪽 벽에는 신선들이 끼리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무슨 이야기일까?

게, 수달, 토끼, 돼지에서 도깨비, 야차, 삼신할미, 신선까지

사찰 구석구석의 보물찾기

이 책은 사찰 안의 ‘보물찾기’다.

여느 문화재 안내서처럼 전각과 불상 그리고 탑을 쫓아가지 않는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볼 수 있을 것 같다. 현판 뒤에 몰래 숨겨진 돼지, 사천왕 밑에 깔린 도깨비, 부도 안에 새겨진 전설의 새 가릉빈가, 절 뒤편 은밀한 전각 안에 있는 삼신할미….

이렇게 사찰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지만 그 의미가 남다르다. 수천 년 세월을 거치며 ‘정형’을 만들어온 건축이나 회화에 의미 없이 배치된 것이 있을 리 없다.

사자나 용, 코끼리, 가릉빈가처럼 불교 경전에서 유래해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이 땅 절집에까지 흘러들어온 동물과 전설 속 주인공도 있고, 호랑이나 도깨비, 삼신할미처럼 우리민족 고유의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불교와 습합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자리 잡은 것도 있다. 유교나 도교의 영향에 의해서 자리 잡은 매란국죽이나 신선들의 모습도 인상적이고, 민화의 바람을 타고 들어온 게나 포도 그리고 토끼와 거북이 같은 벽화도 남다르다. 돼지처럼 화재를 막아달라는 바람 때문에 절집에 보초를 서고 있는 동물도 있다.

절집에 살게 된 사연도 가지가지

이 책에 나온 주인공들이 절집에 살게 된 사연은 각자 다르지만 크게 몇 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는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반야용선 개념 때문이다. 사찰이나 전각을 생사고해를 넘어 피안의 정토에 이르게 하는 배로 본 것이다. 사찰이나 전각이 배가 되니 주변은 온통 바다다. 바다에 수중생물이 없을 수 없다. 물고기, 거북은 물론 아예 절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게, 가재 등이 등장한다.

둘째는 민화의 유행 때문이다. 민화가 절집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건 19세기부터다. 그전까지 사찰 벽에는 주로 불교와 관련 있는 그림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민화의 유행으로 사찰 벽에 불교 교리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동물과 식물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민화에는 일반 백성들의 염원을 담은 그림들이 많았으니 피폐해져가는 사찰에 사람을 끌어 모으는 데도 일조했을 것이다. 넝쿨이 풍성한 포도 그림(다산), 갈대를 꽉 부여잡은 게 그림(과거 합격) 등이 그렇고, 달에서 방아를 찧는 토끼 그림이나 거북이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토끼 조각, 삼국지 이야기를 그린 그림 등이 그렇다. 물론 민화의 사찰 유입은 민간과 사찰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던 것과 궤를 같이한다.

셋째는 사회적 분위기나 사건 때문이다. 임진왜란 등 전쟁으로 목조 건물인 사찰이 불에 타고 역질로 한해에 적게는 수만 많게는 수십만이 죽어나가던 현실은 사찰의 그림이나 조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달이나 해태 그리고 심지어는 돼지까지도 화마 방지를 위해 절에 세워두었다. 사찰에 장승이 등장하는 시기도 전염병의 창궐과 정확히 시기가 일치한다. 아예 전각 자체를 바꾸기도 했다. 시왕전과 지장전은 전쟁과 역질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아예 명부전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지고 원인도 모른 채 죽었거나 혹은 무주고혼인 사람들을 위로하게 된다. 바람이 있으니 종교는 당연히 ‘응대’해야 했을 것이다.

넷째는 다른 종교나 민간신앙의 영향 때문이다. 도깨비나 삼신할미처럼 우리 민족 고유의 민간신앙에 영향을 받은 그림이나 조각들도 있고 유교의 영향을 받아 매란국죽도 사찰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또 도교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팔선이 사찰 곳곳에 그려지기도 했다. 불교 입장에서는 낯설지만 순례객이나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흥미롭다.

이처럼 이 책에는 사찰 곳곳에 가지가지 사연을 갖고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상상과 전설의 주인공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자 다른 사연을 풀어주고자 때론 불교경전이 동원되고 때론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가 등장하며 때론 다른 종교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이 땅까지 온 것도 있으니 당연히 역사와 지역에 대한 이야기도 가득 차 있다.

보물찾기 안내도 400장의 컬러 사진

전각이나 탑 그리고 불상처럼 찾아가면 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굳이 이렇게 찾아주고 들어줘야 보이는 것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것들은 한눈에 볼 수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것,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불국사 현판 뒤 멧돼지처럼 찾기는 힘들지만 여하튼 우연히 발견돼 너도 나도 찾는 ‘보물’이 있지만 대개는 아무리 절집을 많이 다닌 사람들도 찾기 힘들 곳에 숨어 있다. 때론 사찰의 주지 스님조차 행방을 모르는 동물과 식물이 즐비하다. 완주 송광사 천장의 게나 거북 그리고 물고기는 아무리 법당을 드나들어도 찾기가 힘들다. 김해 은하사의 어변성룡은 30년 이력의 법당 보살도 찾지 못한 보물이고, 풀숲에 가려진 여수 흥국사 대웅전 기단의 게는 절에 사는 스님도 처음 본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무척 친절하다. 숨겨진 보물을 찾아주고 그걸 400여 장의 컬러 사진과 함께 보여주며 그 내력에 대해 여러 사연들을 다각도로 들려준다. 문화답사 40년 경력의 필자만이 가능한 ‘안내’다.

책속으로 위로

『본생담』이 중국으로 건너온다. 그런데 중국에는 악어가 흔하지 않으므로 악어 대신 용으로 대체하여 용과 원숭이 전생담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서는 악어의 아내가 용왕이 되어 토끼의 간을 원하고 용은 자라로, 원숭이는 토끼로 변신하게 된다. 곧 악어나 원숭이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므로 쉽게 볼 수 있는 동물로 대체하여 대중에게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꾸민 것이다. 그럼 왜 자라가 토끼를 등에 태우고 용궁으로 가는 장면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만들어져 절집 안에 나타나게 된 걸까? 용왕의 신묘한 능력으로 만들어진 용궁은 불교에서 바닷속에 있는 또 하나의 불국정토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경전도 있다. 『해룡왕경(海龍王經)』에 ‘해룡왕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신심에 차서 부처님께 용궁에 오시기를 청하니 부처님이 응낙하였다. 해룡왕은 신통조화로 바닷속에 들어가 큰 대궐을 짓고 무량보주로 장식하였으며 부처님은 모든 비구·보살과 함께 용궁에 들어가 용왕을 위하여 설법하였다’고 하였다. 곧 자라가 토끼를 등에 태우고 용궁으로 가는 모습은 보살이 중생을 불국정토로 인도하는 장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토끼를 태운 거북이나 자라 그림이 벽화로 그려지고, 수미단의 조각으로도 나타나고, 나무 조각으로 만들어져 법당의 외부에 배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용궁은 수중세계이니 법당을 화재로부터 보호하려는 소망도 함께 담아 낸 것이라 하겠다.

25쪽~28쪽 「사령과 사신 - 거북」 중

 

 

게 조각은 법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법당을 중생들을 태우고 극락으로 건너갈 반야용선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그러한 생각들을 조각으로 나타내게 된다. 법당이 배라면 그 뱃머리는 정면 중앙계단이 되니 이 중앙계단의 소맷돌에 용을 새겨 넣은 사찰이 수도 없이 많다. 천은사 극락보전(보물 제2024호)의 경우는 정면 현판 옆에 이미 청룡 황룡이 있지만 좌우에 있는 귀공포 위의 청룡, 황룡의 꼬리가 법당 뒤쪽 귀공포 좌우에 조각되어 있다. 곧 전면 귀공포에 조각된 용의 꼬리가 대각선으로 건너가 뒤쪽 귀공포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정면 소맷돌에 용이 없는 대신 아예 법당을 배의 몸통으로 보고 앞, 뒤로 용의 머리와 꼬리를 새겨 넣어 법당이 반야용선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둔 것이라고 생각된다. 소맷돌에 용을 조각했어도 법당이 물에 떠 있는 용선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게와 자라를 법당 기단석에 새겨 넣은 법당도 있다.

이런 조각이 여수 흥국사 대웅전(보물 제396호) 기단부에도 있고 청도 대적사 극락전(보물 제836호) 기단부에도 있다. 흥국사의 경우는 마당 석등의 대좌도 거북이로 하여 한 번 더 바다라는 것을 강조한 듯하다

130쪽 「육지와 수정의 생물 -게」 중

 

 

지금 남아 있는 돌장승들의 명문을 보면 1600년대 말부터 1700년대 초반까지 집중적으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목장승까지 곳곳에 세워졌다고 생각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장승들이 전국 곳곳의 마을, 절집, 성문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 전국적으로 1,200여 곳이나 된다. 그럼 왜 이 시기에 이러한 장승들이 집중적으로 세워졌을까? 그건 바로 전염병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중략)

이런 역질이 절집이라고 피해 갈 리 없으니 민간에 세워지던 장승이 자연스럽게 사찰 입구에 등장하게 된다. 사찰 장승이 세워진 연대를 봐도 전염병이 창궐하던 그 시기에 동시다발로 만들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장승에 새겨진 명문도 처음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었는데 이유는 이 시기에 가장 무서운 역질은 천연두였고, 천연두는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교에서 상원(上元)은 음력 정월대보름으로 천관(天官)이 복을 내리는 날이고, 하원(下元)은 시월대보름으로 수관(水官)이 액운을 막아 주는 날이다. 쉽게 말해 복은 받고 재앙을 막겠다는 의미로 중국 주(周)나라의 장군과 당(唐)나라의 장군을 총동원한 것이다.

270쪽~273쪽 「상상과 전설의 주인공 - 장승」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찰의 벽화나 탱화를 보면 고려 시대까지는 신선들의 모습을 그리는 풍속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불교가 국교였고 국가의 지원을 확고하게 받고 있었기에 왕실이나 민간에 퍼진 도교의 신선들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국가의 지원은 끊어졌고, 도심의 사찰은 철폐되었으며, 사대부들의 발길도 저절로 줄어들었다. 사찰을 유지·보전하기 위한 재정적 압박이 심해지다 보니 저절로 스러지는 사찰도 생겨났고, 양반들의 횡포로 강제적으로 폐찰되는 사원도 발생했다. 사찰 터가 명당이다 보니, 조상의 묘를 쓰기 위해 힘없는 스님들을 완력으로 쫓아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폐찰시킨 충청남도 덕산의 가야사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특히 정조가 1800년에 붕어한 후 안동김씨 한 가문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면서 백성들의 살림은 더욱 곤궁해졌고, 불교계도 그 영향으로 더욱 더 피폐해졌다. 스님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물론 신도들의 시주에 의해서만은 사찰 유지가 힘들었다. 스님들은 누룩을 만들고 종이를 뜨고 방아를 찧었다. 신도들도 사찰의 어려운 살림을 돕기 위해 칠성계, 산신계, 지장계 등을 만들었으니 일반 백성들의 평범한 바람인 무병장수·소원 성취·조상 천도를 빌어 주는 현세 구복적 모습이 확산되었다. 형편이 이러하니 민간에 익히 알려진 신선들의 벽화가 등장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의 하나였다. 괴로움의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장생불사의 신선 세계로 가거나 번뇌가 끊어진 극락정토로 가는 것은 평범한 백성들의 꿈이었겠지만 점점 더 힘들어지는 세상살이에서 그 바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사찰의 법당 내외의 벽이나 천장에 여러 신선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다 시대의 요청이었던 것이다.

385쪽~388쪽 「상상과 전설의 주인공 - 신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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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대  bulkwan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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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창환 2019-10-17 06:57:05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이 나와 바로 사 보았습니다. 책이 전반적으로 잘 되어 있습니다만, 사찰 색인이 없어 아쉽습니다. 어딜 가기 전에 책으로 먼저 확인해 보는 용도로는 활용도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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