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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신화] 부처님은 왜 길에서 태어나셨을까?
살라 나무가지를 붙잡고 있는 마야 왕비, 꼴까따 인디언뮤지엄 소장

‘길’과 집, 그리고 길에서 태어난다는 것 길! ‘길’이라는 우리말처럼 ‘길’의 의미를 잘 대변 해주는 낱말도 없다. 길과 상대되는 단어는 ‘집’ 이다. ‘집’을 발음해보자. ‘집’을 발음하면 마지막 에 저절로 입이 닫힌다. 그렇다. 집은 닫힌 공간이다. 닫힌 공간을 열기 위해서는 ‘문’이 필요하다. 문을 열고 나서면 ‘길’이 있다. ‘길’이라는 단 어를 발음해본다. ‘길’을 발음하면 아랫니와 윗니가 열린 채로 입술과 입은 먼 곳으로 ‘길게’ 열려 있다. 그렇다. 길은 집으로부터 나와 세상을 향해 ‘길게’ 열려 있다. 이렇게 길은 세상으로 길게 열렸다가, 멀리멀리 나가기는 하지만, 온 세상을 채 다 돌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끝난다. 집이 아늑한 공간이라면, 길은 불편한 공간이다. 집에서는 눕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길에서 누우면 노숙자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사람은 인생을 시작할 때와 마무리할 때에 필히 집에서 시작하고 집에서 마무리한다. 오늘날에는 집 대신 병원에서 시작하고 병원에서 마무리하지만, 병원은 모든 안전책이 구비된, 집보다도 더 집인 곳 이다. 그런데 여기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생을 마감하신 분이 계시다. 길에서 태어나는 일도 드물 진대 길에서 마무리까지 하신 분, 그분이 바로 부처님이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참으로 불행하게 태어나서 불행하게 떠났다 하겠지만, 부처님이야말로 인간 중에 가장 행복하셨던 분이라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 따라서 부처님의 생애를 생각하면, 길에서 태어났거나 길에서 죽었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다.

 

| 최초의 ‘인간 선언’ - 신보다 깨달음을 얻은 인간이 더 위대하다

마야 왕비가 임신하자 수많은 천신(天神)들이 왕비를 보호하였다. 왕비는 임신 기간 내내 청정한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어떤 삿된 생각도 하지 않 았다. 왕비는 수행자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배 속의 아이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다분히 신화적이지만, 그 내용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임신 하면 아이를 위해 청정한 생활을 유지하고 어떤 삿된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고, 아이가 어떤 상태 인지 엄마는 항상 관심을 갖고 집중하고 있어야 하며, 그러면 천신들이 엄마와 아이를 보호해준 다는 메시지다.
해산달이 되자 왕비는 친정으로 가서 아기를 낳기로 했다. 숫도다나왕은 신하들에게 왕비의 친정인 데와다하로 가는 길을 말끔하게 정돈 하라고 명령했다. 깨끗하게 정돈된 길을 따라 왕비 일행은 가볍게 길을 나섰다. 힘들게 해산하러 가면서도 왕비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왕비 일행이 카필라바스투와 데와다하 사이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있는 룸비니라는 동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새들과 나무와 꽃과 나비와 벌들이 어우러진 숲을 본 왕비는 그곳에서 잠시 쉬고 싶어졌 다. 부드러운 풀밭을 걸어가던 왕비는 한 나무 아래서 문득 산기를 느끼고 나뭇가지를 잡았다. 시 녀들은 서둘러 나무 주위로 천을 둘러 울타리를 만들어주었고, 왕비는 아무 고통 없이 선 자세로 아기를 낳았다. 아니 왕비가 아기를 낳았다기보 다는 아기가 어머니의 옆구리 쪽으로 유유히 빠 져나왔다. 그리하여 그 나무는 아무런 고통도 없 이 아기를 낳게 했다 해서 아소까(Asoka, 無憂)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는데, 초기 문헌에는 왕비가 살 라(Sāla)나무 가지를 잡았다고도 한다. 부처님 신화의 주요 장면에는 반드시 신들이 등장한다. 당연히 부처님께서 인간세계에 탄생 하는 특별한 날 신들이 등장하지 않을 리가 없다. 당시 사람들에게 크게 추앙을 받았던 신은 창조 의 신 브라흐마와 비와 번개의 신 인드라였다. 브 라흐마와 인드라는 왕자를 받아 모시면서, “왕비 시여, 기뻐하십시오. 큰 힘을 가진 아드님이 태어 나셨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막 나왔지만 아기는 온몸이 아주 깨끗한 상태였다. 양수도 묻지 않고 점액 도 묻지 않고 피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늘에 서 차가운 물줄기와 따뜻한 물줄기가 내려와 어 머니와 아기를 씻겨주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 자, 온 우주에 측량할 수도 없고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로 광휘로운 빛이 나타났고, 일만 세계가 흔 들리고 전율하였다. 더욱 믿기 힘든 장면은 그다음에 펼쳐진다. 왕자는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었다. 걸음 을 옮길 때마다 땅 위에서는 연꽃이 솟아올랐다. 브라흐마 신은 왕자를 뒤따르며 흰 양산을 씌어 주었고, 인드라 신은 야크의 꼬리털로 만든 총채 를 들고 왕자를 따라갔다. 미얀마의 밍군 사야도 는 자신의 책 『대불전경』에서 왕자가 땅 위를 걸 었지만, 인간들에게는 마치 허공을 걷는 것처럼 보였고, 왕자가 옷을 입지 않은 채로 걸었지만, 사람들은 왕자가 옷을 입은 채 걷는 것처럼 보였 다고 말한다. 왕자는 모든 방향을 두루 돌아보고 는 사자처럼 외치셨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내가 가장 존귀하다. 나 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으로부터 중생들을 제 도하려 하노라.”(『장아함경』 『유행경』) “삼계의 모든 중생들 중에서 내가 가장 으뜸 이다. 이번이 나의 마지막 생이다. 나에게 다음 생은 없다.”(『디가니까야』 『대본경(Mahapadanasutta)』) 이 말씀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이후에 하실 말씀을 미리 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당 시 세간에서 위대한 존재로 추앙받는 이들은 인
간에 비해 힘이 엄청나게 센 천신들이었다. 아기 부처님의 선언은 브라흐마나 인드라보다도 깨달 음을 얻은 붓다가 더 위대하다는 것이지, 자신이 독불장군(獨不將軍)임을 말한 것이 아니다. 깨달음 을 얻어 붓다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간존재는 어 떤 훌륭한 신들보다 위대하다는 선언은 당시 인 도 사회에서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인간은 당연 히 신들에 비해 하위에 놓인 존재라 여겨지던 시 대에 인간이 오히려 더 위대하다고 선포한 최초 의 ‘인간 선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번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다”라고 하신 뜻은 이번 생애에 아라한이 되어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심을 의미한다.

 

| ‘칠각지의 길’을 통해 ‘육도윤회의 길’을 벗어나자

이 장면은 부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신화적인 부분이다. 어머니가 나뭇가지를 잡고 서 있는데, 아기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살며시 빠져나 온다. 세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인도의 위대한 영웅들은 모두 신이(神異)한 탄생 신화를 갖고 있다. 인도뿐만 아니라 세상의 위대한 영웅 들은 대부분 신이한 탄생 신화 속에서 태어난다.
 

흔들림 없이 바로 다리를 옮겨 넓게 대지를 밟으시고는 당당히 일곱 걸음 내디디시니 그 모습 마치 일곱 개의 별과 같구나

보리(普提)를 위해, 중생의 이익을 위해 태어나셔서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니 고통에 빠진 중생을 건지리라 사방을 둘러보면서 사자처럼 외치셨네
- 아슈바고샤, 『붓다차리타』에서

 

왕자가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문헌도 있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문 헌도 있다. 북쪽에는 히말라야가 있으며, 범접하 기 힘든 히말라야는 인도인에게 신들의 공간으 로 여겨졌다. 아기 붓다가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 을 걸은 것은 붓다의 인간 선언이 ‘신들을 향한 외침’임을 뜻하지 않을까?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것은 ‘인간 선언’이 온 우주를 향한 선포임 을 의미하며, 사방을 둘러본 것도 같은 의미이다. 아기 붓다는 왜 ‘일곱 걸음’을 걸으셨을까? 송강 스님은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 등 육도를 완전히 벗어나 일곱 번째 세계에 도달 할 것임을 암시한 것이라 말한다. 일리 있는 해 석이지만,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자. 단 세 걸음만 걸었다고 하면 너무 순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 는가? 열 걸음을 걸었다고 하면 게송을 읊기에는 너무 길게 느껴지지 않는가? 일곱 걸음은 사자후 를 토하기에 가장 적당하다는 것이다. 7을 행운의 숫자라고 하는데, 그 근원을 기독 교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 따르면 신이 세 상을 창조할 때 6일을 일하고 7일째 쉬었다는 것에서 7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7이 길한 숫자가 된 것은 붓다의 탄생 신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된다. 일곱 걸음이 붓다가 나아갈 길에 대한 상징이라면, 그것은 수행의 길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일곱 걸음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일곱 가지 길(七覺 支)을 상징한다 해도 무방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부처님의 탄생 신화 속 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두 갈래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육도윤회의 길이고, 하나는 칠각지의 길이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태어나자마자 일 곱 걸음을 걸으시고 사자후를 토하셨다는 붓다의 탄생 신화는 우리에게 붓다가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인간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칠각지를 열심히 실천하여 육도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동명 스님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지홍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았고, 2015년 중앙승가대를 졸업한 후 구족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북한산 중흥사에서 살고 있다. 출가 전 펴낸 책으로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동명스님  bulkwan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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