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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불교 개론] 윤회와 해탈, 자기의 재생산과 그 해방
  • 장휘옥, 김사업
  • 승인 2019.09.26 14:25
  • 호수 539
  • 댓글 0


원 율사라는 스님이 대주(大珠慧海, ?~?) 선사에게 와서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그렇다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네(飢來喫飯, 困來卽眠).” “그거야 모든 사람이 다 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도 스님처럼 도를 닦는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 않네. 사람들은 밥 먹을 때 오로지 밥만 먹지 않고 이것저것 요구가 많고, 잠잘 때 잠만 푹 자지 않고 온갖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그게 나와 다른 까닭이야.” 율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운문(雲門文偃, 864~949) 선사가 말했다. “15일 이전은 그대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 한마디 해 보라.” 스스로 대답하길,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

 

윤회 = ‘자기의 재생산’ 과정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 인류는 수렵·채집의 사회에서 농경·목축의 사회 로 옮겨 갔다. 자연에서 식물을 채집하고 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통해 음식 등을 충당하면서 생존하던 인류가 식물을 스스로 재배하고 동물을 스 스로 키워 생계를 유지하는 사회로 나아갔던 것이다.

농경 사회로 이행되면서 수렵·채집의 시대에는 없었던, 집단 내에서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 분담이 생겨났다. 농사를 짓는 사람과 농지를 지키는 전사(戰士), 계절의 주기를 파악하여 농사철의 시기를 관장하는 제사 관이라는 역할 분담이 생겨, 그 역할이 부모에서 자식으로 상속되어 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인간은 자연 상태의 야성 그대로 성장하는 것이 아 니라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배우고 익히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동물을 가축화하여 지속적으로 키우고 필요한 식물을 심어서 기르는 것을 ‘동식물의 재생산’이라 한다면,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맞게 사람을 키우는 것은 ‘인간의 재생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재생산’이 라는 말에는 ‘어떤 목적에 맞게 해당하는 그것을 지속적이면서 안전하게 유지시켜 나간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런데 동식물과 인간의 재생산뿐 만 아니라 ‘자기의 재생산’도 있다. 이상의 재생산에 관한 내용은 바바 노리히사(馬場 紀寿)의 『초기불교』에서 도움을 받았다.

‘자기의 재생산’은 자기 자신을 자신이 욕망하는 형태로, 오랜 시간 동안, 나아가서는 이생을 넘어서 다음 생까지, 더 나아가서는 영원토록 안전하게 유지시키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누가 자신에게 심한 욕을 했다면 대부분의 경우 욕한 사람에 대한 서운함이 마음에 남고 언젠가는 되갚고자 한다.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욕한 상대에게 앙갚음을 한다. 그 앙갚음에 상대는 또다시 맞대응하고, 그 러면 이쪽은 또 앙갚음하고. 이런 식으로 앙갚음과 맞대응의 연쇄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이렇게 욕이 마음에 남는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욕에 대한 일련의 반 응들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마음은 하나의 심리 적·인식적 사건을 그 순간의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시간 속에서 그에 대해 일련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일련의 반응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쁜 반응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때로 착하고 칭찬받을 반응도 보인다. 욕한 상대를 이해하려 하거나 그를 용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반응도 그에 대 한 보상을 받기 위한 경우가 많다. 이해와 용서를 하면 자신에 대한 평판 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수도 있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 내지는 그 대가로 언젠가는 찾아올 유익한 복을 얻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일시적 후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기대와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짜증을 내고, 다시 새로운 반응을 도모한다. 욕에 대한 반응만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 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 소유하고자 하는 부와 지위와 연인의 변화에 대한 반응 등도 함께 진행된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진행되는 무수한 반응 들의 다발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러한 반응들이 끝없이 이어질까? 이러한 반응들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다. 원치 않는 것 에는 내가 부수어지지 않도록 하고, 원하는 것은 확실하게 잡아서 안전하게 자기를 유지하기 위한 발버둥이 바로 이 반응들이다. 생명체가 자기를 유지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식물이 성장을 위해 햇볕을 향해 가지를 뻗고, 들소 떼가 풀을 찾아 이 동하며, 내가 용변이 마려워 용변을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상인의 경우 용변을 보았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이번 용변에 대해 이어지는 반응은 없다. 그러나 위에서 예로 든 반응의 다발은 자연스러운 생명 유지라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다. 자신의 욕망과 집착대로 끝없이 자기를 지속시 키려는 내면의 끈질긴 움직임인 것이다. 보통 사람 누구에게라도 있는 이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자기의 재생산’을 도모한다. ‘자기 재생산’의 과정 은 긴장의 지속이며, 기쁨이 슬픔의 씨앗이 되는 흐름이다.

성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긴장하며, 성공의 기쁨이 클수록 그것이 무너질 때의 고통 또한 얼마나 큰가. 지금과 같은 ‘자기의 재생산’ 과정을 그대로 두고도 ‘괴로움의 영원한 소멸’인 열반이 가능한 길이 있을까? 없다. 윤회(輪廻)란 태어남과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겪는 괴로움이자 속박의 굴레다. 생을 거듭하면서 진행되는 ‘자기의 재생산’ 과정이 바로 윤회이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자기의 재생산’ 작용은 또 한 번의 윤회가 형성되는 요인이 된다. 여기서 해방되는 길은 없는가?
 

| 열반·해탈, 그리고 오취온

‘열반(涅槃)’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니르와나(nirvāṇa)’이며 빨리어 는 ‘닙바나(nibbāna)’이다. 이 말은 ‘소멸하다’, ‘불이 꺼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소멸’, ‘불이 꺼짐’을 의미한다. 무엇의 소멸일까? 초기 경 전에 설해진 내용에 따르면, ‘괴로움의 소멸’이며 ‘탐(탐욕)·진(증오)·치(어리 석음) 3독의 소멸’이다. 열반이 의미하는 두 가지 소멸을 연결시키면, 3독이 소멸되어야 괴 로움도 소멸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3독은 갈애와 무명의 다른 표현 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갈애와 무명이 소멸되어야 괴로움이 소멸된다 는 것도 알 수 있다. 한편 열반과 해탈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해탈(解脫)’은 속박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직전 호에서 색·수·상·행·식의 오온에 대해 설명했다. 오온(五蘊)이 라 할 때의 ‘온(蘊)’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스깐다(skandha)’이며, 빨리어는 ‘칸다(khandha)’이다. 이 단어는 보통 ‘요소’로 번역되어, 오온이란 ‘각 개인의 몸과 정신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온’, 즉 ‘스깐다’는 원래 ‘나무줄기’나 ‘굵은 가지’를 의미했다. 우리들이 ‘나’라고 간주하고 있는 무엇을 어떤 나무라고 한다면, 그 나무 는 다섯 개의 가지로 되어 있고 그 다섯 개의 가지가 바로 색·수·상·행· 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색(色)은 신체이며, 수(受)는 좋고 싫다는 등의 느낌, 상(想)은 이미지와 개념을 형성하고 언설을 일으키는 작용, 행 (行)은 의지 등의 형성 작용, 식(識)은 마음 그 자체를 가리킨다. 여러 조건에 의해 생겨난 이 다섯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임시로 한 덩어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의 실제 모습이라고 불교는 본다. 그리고 오래된 세포가 죽는 대신 그 세포 를 원인으로 하여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듯이, 앞의 오온이 원인이 되어 뒤의 오온이 새로이 생겨나는 과정을 통해 오온은 이어져 간다고 본다. 그런데 오취온(五取蘊)이란 용어도 있다. 오온에 집착을 의미하는 ‘취 (取)’가 첨가된 이 용어는 ‘집착의 대상으로서의 오온’ 또는 ‘집착을 일으키 는 오온’을 뜻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초기 불교에서 오온과 오취온은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그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온은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인 반면, 오취온은 번뇌를 동반한 유루 (有漏)이다. 대개의 경우 초기 경전에서 오온인지 오취온인지 설명 없이 그 냥 ‘색·수·상·행·식’으로만 나오기 때문에 그때의 ‘색·수·상·행·식’이 양자 중 어디에 해당되는 것인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기 경전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색은 무상이며, 무상인 것 그것은 고이며, 고인 것 그것은 무아이며, 무아인 것 그것은 … 나의 아뜨만이 아니다”의 경전 구절에서처럼 ‘무상·고·무아’의 주어로 사용되는 ‘색·수· 상·행·식’은 오취온이다. 연기설과 사제설 중에 포함된 ‘색·수·상·행· 식’도 오취온이다. 오취온이 생하면 괴로움(生·老·死) 이 생하고, 오취온이 멸하면 괴로움도 멸한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인다면 오취온은 번뇌와 집착뿐 아니라 괴로움까지도 동반하고 있다. 어리석은 우리는 ‘색·수·상·행·식’이 유기 적으로 결합되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나’라고 오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어리석은 입장에서 보면 오취온이란 온갖 번뇌와 집착을 일으키며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나’에 다름 아니다. 바로 ‘자기의 재생 산’이라는 늪에 빠져 있는 ‘나’인 것이다. 오취온에서 취(取)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와 빨리어는 동일한 형태 인데, ‘우빠다나(upādāna)’가 그것이다. 이것의 원래 의미는 ‘연료’이다. 앞에 서 ‘온(蘊)’은 본래 나뭇가지를 의미한다고 했다. 따라서 오취온이라는 말 은 ‘다섯 개의 땔감’을 암암리에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열반에 해당 하는 산스끄리뜨 ‘니르와나’는 불이 꺼지는 문맥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또한 탐·진·치 3독은 경전에서 불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상의 원래 의미와 그 밖의 관련된 용례를 조합해 보면, 열반이란 ‘다섯 개의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더 이상 공급하지 않아 탐·진·치 3독이 라는 불이 완전히 꺼진 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다섯 개의 나 뭇가지가 오취온이다. 다섯 나뭇가지를 더 이상 공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집착을 동반하는 오취온에서 집착을 동반하지 않는 오온으로 전환한다 는 것이다. 이것은 탐·진·치 3독 내지는 갈애와 무명 없이 사는 것이며, 자기의 재생산 없이 사는 열반·해탈의 삶이다. 이와 같이 사는 것은 실제로 어떻게 사는 삶일까? 우리는 그 살아있 는 예를 당나라 때의 대주 혜해(大珠慧海, ?~?) 선사에게서 찾을 수 있다.
 

|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원 율사(源律師)라는 스님이 대주 선사에게 와서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그렇다네.” “어떻게 노력하십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네(飢來喫飯, 困來卽眠).” “그거야 모든 사람이 다 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도 스님처럼 도를 닦는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 않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밥 먹을 때 오로지 밥만 먹지 않고 이것저것 요구가 많고, 잠잘 때 잠만 푹 자지 않고 온갖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그게 나와 다른 까닭이야.” 율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대주 선사는 도를 닦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느냐는 질문에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고 답했다. 아둔한 사람은 대주 선사의 말을 자기 수 준으로 받아들여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나는 정말 진리 그대로 산다. 남들이 세 끼 먹을 때 나는 네 끼 먹고 시도 때도 없이 자니까.’ 대주 선사와 같은 선승이 위의 말로써 보여 주는 경지는 우리가 생각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우리는 밥 먹을 때 아무런 잡념 없이 밥만 먹지 않는다. 어제보다 반찬이 적거나 맛이 없으면 투정을 부린다. 친구가 던 진 자존심 상하는 말 한마디에 상처받았을 때는 그 녀석 때문에 밥맛이 떨어졌다고 울분을 터뜨린다. 그는 친구의 말 한마디를 곱씹지 밥을 먹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는 나보다 모든 면에서 떨어지던 녀석이 사회에 나가 성공했다고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밥 알을 씹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씹는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만두어야 할 생각을 놓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그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지? 아, 이러면 안 돼. 잠을 잘 자야 건강하지. 자자, 자. 그런데 왜 이렇게도 잠이 오지 않는 거야? 짜증 난다.’

잠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수면제를 찾고 정신과 의사를 만난다. 대주 선사는 밥 먹을 때 잡념 없이 100퍼센트 밥만 먹는다. 잠을 잘 때는 천하를 잊고 100퍼센트 잠만 잔다. 대주 선사의 경지라면 연구할 때 는 100퍼센트 연구에만 몰두하고, 운동할 때는 100퍼센트 운동에만 몰입 한다. 이 순간은 이 순간대로 100퍼센트 살고 다음 순간은 다음 순간대로 100퍼센트 산다. 그는 다음에 있을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설거지를 하면서, 설거지를 마치고 마실 차에 대해 생각하며 허투루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이 순간은 설거지가 전부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싫다’, ‘좋다’ 말을 늘어놓지 않고 만나는 찰나 찰나와 온전히 함께 머문다.

이것이 ‘자기 재생산’을 멈추고 해탈의 경지에서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렇게 살 때 운문 선사가 말한 대로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 된다. 괴 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해탈의 나날이 되는 것이다. ‘매일 매일이 좋은 날’에 해당하는 한문 원문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인데 이것은 『벽암록』 제6칙의 화두이기도 하다. ‘일일시호일’을 ‘날마다 좋은 날’로 번역하여 상대가 원하는 대로 아무런 우환 없이 항상 행복한 날이 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다. 원뜻대로 하자면 ‘오늘이 어떠하든 오늘은 오늘대로 좋고, 내일이 어떠하든 내일은 내일대로 좋다’, ‘궂은 날 이건 맑은 날이건 어떤 날이든 하루하루가 그 자체로서 천하제일의 좋은 날이다’를 뜻한다. 아프면 아픈 대로,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좋은 날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매일 매일이 좋은 날’. 이 말을 당신이 건성으로 외워서 사람들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똑같은 말이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질은 천양지차다. 울림이 없는 말, 그 허황함을 통절히 안 사람은 선(禪)에 눈을 뜬다.

글.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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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휘옥ㆍ김사업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


 

장휘옥, 김사업  bulkwan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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